[표류의 역사,제주-16](5)조선탈출 꿈꿨던 하멜

[표류의 역사,제주-16](5)조선탈출 꿈꿨던 하멜
2부. 외국인의 제주섬 표류기
"서서히 고통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 입력 : 2009. 08.07(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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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서울로 호송되기 전에 거주했던 제주읍성. 하멜 일행은 하루빨리 조선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이들을 꽁꽁 가둬놓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하멜 일행 일부가 조선을 탈출하기까지 13년동안 살아남은 생존자는 표착 당시 36명중 16명이었다. /사진=강경민기자 kminkang@hallailbo.co.kr

끝없는 부역· 노예같은 생활로 고난의 13년 보내
효종 북벌계획 귀환 더디게…마지막 생존자 16명


1653년 8월16일. 제주섬 대정현 해안가에 난파한 하멜 일행에게 맨 처음 닥친 일은 배고픔이었다. 표류 직전 악천후로 요리사가 요리를 할 수 없어 2~3일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서진 배에서 발견한 것은 밀가루 한 봉지, 고기와 베이컨이 조금 들어있는 상자 그리고 포도주였다.

하멜 일행은 그들을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다. 이튿날 무인도인줄 알았던 그곳에 사람이 등장한다. 하멜의 눈에 비친 제주 사람들은 중국식 의상을 입고 말총으로 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때까지 표착지가 쾰파트(제주도)인줄 몰랐던 그들은 혹시 해적이나 추방된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난파된 게 아닌가 싶었다. 하멜과 제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 네덜란드, 조선과 무역활동 꾀해

▲전남 강진군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입웨구에 세워진 하멜동상.

제주섬에서 산산이 부서진 스페르웨르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연합동인도 회사의 소속이었다. 1648년 4월 텍셀을 떠나 12월 인도 바타비아에 도착한 것이 첫 항해였다. 바타비아에 도착한 스페르웨르호는 동아시아 전 지역을 돌며 무역을 벌인다. 당시 바타비아는 연합동인도회사의 동방 무역 전초기지였다. 수많은 무역선이 케이프타운을 거쳐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하멜 일행 역시 바타비아에서 대만을 경유해 일본으로 출발하려다 제주에 표착한다.

당시 그 배에는 조선 돈으로 30만냥에 이르는 무역품이 실려있었다. 목향, 명반, 용뇌, 대만제 녹피, 영양 가죽, 산양 가죽, 설탕가루 등 다양했다. 이들중 일부는 조선의 조정과 하멜 일행이 다시 사용하게 된다. 조정의 한약 제조 도중에 용뇌가 모자라 난파선의 물품을 가져다썼다. 사슴 가죽은 중국 사신에게 진상할 품목으로 선정돼 하멜 일행에게 구입한다. 하멜 일행은 녹피를 돈으로 바꿔 생활하기도 했다.

17세기 하멜 표착이 한국과 네덜란드 교류사의 시초는 아니다. 하멜이나 귀화인 박연에 앞서 네덜란드는 1609년 일본의 히라토에 무역상관을 설치하면서 조선과의 무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듬해 일본과 네덜란드의 무역통상 허가와 관련된 기록에는 동인도회사가 조선을 포함해 일본의 북동부 지역까지 무역 진출을 꾀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 이국적 외모 고관들의 구경거리

하지만 하멜 일행의 조선 생활은 혹독했다. 제주에 머문 기간은 표착 직후부터 1656년 3월까지 약 1년 9개월간. 표착지 대정현에서 제주목으로 이송된 하멜 일행에게 쌀과 밀가루가 지급된다. 겨우 제공된 반찬은 입에 댈 수가 없어 소금을 물에 타 마시는 것으로 대신한다. 당시 제주목사는 이원진. 하멜이 '일흔살 정도로 선하고 이해심이 있는 사람'으로 기록한 이원진 목사는 일본으로 떠나고 싶은 표류인의 바람을 들어주려 노력했지만 조선의 정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효종의 북벌 계획으로 군비 강화가 중요하던 시대인 만큼 서양인인 이들을 송환하기 보다 병기 개발에 참여시킬 목적이 컸다.

1654년 1월 이원진 목사는 임기를 끝내고 제주를 떠난다. 신임 목사는 쌀 대신 보릿가루를 주고 부식은 제공하지 않았다. 외출과 식량이 통제되자 일등 항행사와 선원 3명을 포함한 6명이 일본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실패로 끝났다. 제주목사는 붙잡혀온 그들에게 "물과 식량도 없이 작은 배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답한다. "서서히 고통받는 것보다 빨리 죽는 것이 더 낫다."

6월초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에게 일본 송환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하고 훈련도감에 배치된다. 군인으로 생활했지만 때로 고관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들중 일부가 청나라 특사 방문을 계기로 다시 탈출을 감행한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하멜 일행을 사형에 처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결국 1년 9개월만에 전라도로 유배된다. 표착 인원 36명중에서 33명만이 살아남은 때였다. 서울 호송때 부상자 1명이 사망했고, 탈출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던 2명이 죽었다. 전라도 병영생활에서는 11명이 다시 세상을 뜬다.

하멜 일행은 늘 조선 탈출을 꿈꿨다. 더러 호의를 베푼 조선 관리도 있었지만 끝없는 부역과 노예같은 생활로 두려움에 떨었다. 1666년 마침내 하멜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두 배의 값을 주고 배를 구해 8명이 그해 9월 탈출에 성공한다. 조선에 남아있는 이들은 하멜 탈출후 조·일간 송환 교섭을 통해 1668년 이 땅을 떠난다. 13년만의 일이다. 끝끝내 살아남은 자는 16명이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어떤 나라로 기억되었을까. 하멜은 어제일처럼 그 당시를 생생하게 써내려간 '하멜보고서'를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

하멜 기념사업 이대로 좋은가

용머리해안 전시관 관리 부실 등 문제

우리는 하멜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하멜표류기' 등을 통해 일찍이 친숙한 네덜란드인 하멜은 지금 기념관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하멜 일행이 강진 병영에서 7년간 보낸 인연에 주목한 강진군은 1998년 하멜의 고향인 호르큼시와 결연했고, 2007년 12월엔 하멜기념관의 문을 열었다.

호르큼시에서 기증한 하멜 동상이 관람객을 맞이하는 하멜기념관은 남도의 섬을 상징한다는 타원형 건축으로 지어졌다.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 문화적 상황, 하멜 당시의 동서양 도자기, 고지도 등 200여점을 전시해 놓았다. 어린이 관람객을 위한 학습용 책자까지 제작하는 등 하멜기념관을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자치단체의 바람이 읽히는 공간이다.

제주 역시 하멜을 붙들었다. 하멜 표착 350주년이 되는 해에 옛 남제주군은 안덕면 용머리해안에 하멜상선 전시관을 세웠다. 하멜의 제주 표착 날짜에 맞춰 2003년 8월16일 개관된 것이다.

하지만 개관한지 6년이 흐른 전시관은 썰렁하다. 자료를 지속적으로 보완하고 전시품을 관리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전시실 하나는 아예 네덜란드 출신 감독이란 점을 들어 '히딩크와 월드컵'으로 꾸며놓았다. 그마저 다른 공간과 다를 것 없이 조악한 전시물로 채웠다.

당시 용머리해안에 하멜상선 전시관을 세울 때 논란이 일었다. 공간 관리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전시관 건립 의미를 빛바래게 하고 있다. 하멜상선 전시관, 이대로 둬야 할까.

한국하멜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지난해 8월 서귀포에서 '하멜 제주난파 355주년 및 희생자 49위 추모제'를 열었던 채바다 시인은 "국제자유도시 제주의 글로벌 정책과 맞물려 하멜 기념 사업을 의미있게 진행할 수 있는데도 당국이 무관심하다"면서 "강진군의 행보에 비해 제주도는 하멜 관련 사업에 소극적"이라고 했다. 한국하멜기념사업회는 이달 16일 서귀포시 약천사에서 '하멜 제주난파 희생자 추모제'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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