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왕족 이건 형제들과 제주여인들(3)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왕족 이건 형제들과 제주여인들(3)
유배 풀려도 출륙금지령으로 가족간 이별
  • 입력 : 2012. 02.27(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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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계보에는 이건 형제들이 제주에서 낳은 자식들의 이름이 올라 조정이 이들을 왕족으로 인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성군의 차남 해안군 이억이 제주에서 유배 중 경주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의 이름에 제주를 뜻하는 '탐(耽)'자를 썼다.

강원도로 유배지 옮긴 후 사면·관직 제수
임금에게 "제주자식들 보고 싶다" 청원도

이건 가족들이 강원도로 떠나자마자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이때 먼저 유배에서 풀린 4남 해령군 급이 인조를 성심껏 호위한 덕분에 난이 끝나자 포상을 받고 부친인 인성군의 관작도 회복됐다. 1637년 봄에는 이길과 이억, 이건 3형제에게도 사면령이 내려지고 관직이 주어졌다. 인조는 이어 임금의 일가를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종친부 유사의 책임 아래 이들에게 혼처와 혼수를 마련해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자 장남 이길, 차남 이억, 4남 이급은 제주에서 이미 결혼해 자식이 있으니 그들을 데려오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조정에서 왕자들의 청원을 논의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상이 하교하기를 '해평군 이길, 해안군 이억, 해령군 이급의 자녀가 제주에 살고 있다 하니 본도의 감사에게 명령을 내려 그들을 내보내게 하라'하고,(인성군 이공이 사사된 뒤에 그 아들들을 다 제주로 귀양 보냈는데, 그곳에서 여자를 보아 자녀를 출산하였다. 나중에 풀려나 돌아올 때 그 자녀들은 국법에 구애되어 나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하교가 나온 것이다.) 또 정원에 하교하기를, '그 어미들까지 다 내보내 모녀로 하여금 서로 의지하여 살아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회계하기를, '제주의 인물이 육지로 나오는 것을 금한 것은 곧 조종조로부터 내려온 고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가 아무리 친족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결코 그 어미들까지 육지로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국법이 이와 같으므로 감히 함부로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인조실록 권45 인조 22년 4월 16일, 인용문 중 괄호 안은 사관이 실록에 기록한 내용)

요점을 정리하면 왕자들이 제주에서 얻은 자식들은 한양의 아버지 곁으로 불러올리되, 그 왕자의 여인들은 '제주섬 사람들은 제주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출륙금지령을 어기면서까지 서울로 오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출륙금지령은 인조 7년인 1629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인조실록은 임금의 조상을 뜻하는 조종 때부터 내려온 법이라고 기록해 인조 임금 이전부터 시행됐음을 알려준다. 실제 실록을 보면 이보다 200년 전인 세종 16년(1434년) "말 도살자는 육지로 보내고 다른 자는 출륙을 금지한다. 만약 그에 따라 출륙자는 고발하도록 한다"는 조치가 이미 취해졌다. 또한 명종 10년(1555년) 을묘왜변 이후에는 제주에 왜구가 침입하자 국경 수비대라 할 수 있는 육지의 수군(戍軍)들을 제주에 배치하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제주 방위를 위해 제주인의 출륙을 막기도 했다. 더구나 특산물 진상과 방위 전략상 주요 거점인 제주의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서는 여인의 출륙금지령이 큰 효과를 발휘했으며, 노비의 출륙까지 철저히 단속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제주의 자식들은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제주여인들은 남편이 떠나고 자식까지 빼앗긴 상태에서 생이별의 아픔을 지니고 지낼 수밖에 없었으며, 왕자들은 제주에 부인이 있으면서도 임금의 거듭된 명을 어길 수 없어 다시 혼인해야 했다. 그로부터 다시 몇 년이 흘러 이 문제는 조정에 파란을 일으킨다. 한양으로 올라간 자식들이 성년이 돼 혼인을 치르게 되자 어미가 없이 어찌 혼인을 치르겠냐는 의견이 제시돼 출륙금지령 시행 중에도 제주여인들이 비로소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이때 오랫동안 헤어져 그리던 자식과 어미가 만나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하 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건은 당시 형 이억의 여인 경주이씨와 동생 이급의 여인 청주한씨가 상경해 아들을 만나는 슬픈 광경을 '子母逢(자모봉)'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인간사에 무슨 일로 슬픔을 감당하나/ 15년을 생이별이라니/ 아들과 어미가 만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웃고 물어보네, 내 아들이냐고."

보는 이들의 가슴까지 먹먹하게 만드는 모자 상봉의 기쁨도 그뿐, 곧이어 기막힌 슬픔이 제주여인들을 덮친다. 왕자들이 유배가 풀린 후에 새로 혼인한 한양의 부인들이 제주여인을 첩실로 대하는 것이었다. 조선조에서는 혼인을 두 번 할 수 없었다. 제주에서 유배인의 처지였으나 정식 혼례를 치렀는데도 종친부의 허락이 없었다면서 추인을 해주지 않아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주부인이 낳은 자녀와 한양 부인이 낳은 자녀 사이에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나는데도 정실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아 서열이 아래로 내려가자 폭행사건까지 벌어지게 된다.

/표성준기자·김순이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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