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블루오션 물산업H2O](12)상수도 개발역사-(상)제1의 물 혁명

[제주의 블루오션 물산업H2O](12)상수도 개발역사-(상)제1의 물 혁명
물문제 해결 노력 30년만에 전국 최고의 상수도 보급
  • 입력 : 2012. 07.23(월) 00:00
  • 고대로 기자 bigroad@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1967년 연두 순시차 제주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의 구상에 의해 착수된 어승생수원 개발사업은 제주도 물의 혁명을 가져온 대역사였다. /사진=한라일보 DB

1961년 제주도 최초로 관정식 지하수 개발 성공
박정희 대통령 어승생수원 개발사업 연구 지시
바닥 함몰 등 우여곡절 끝 10만여톤 저수지 건설

제주특별자치도는 지난 1961년 정부와 USOM(Unite States Operations Mission; 미국대외원조기관)의 지원으로 중산간지대 지하수 심정굴착 가능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같은해 10월 10일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에서 당시 김영관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지역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하수 관정 굴착공사 기공식을 가졌으며 12월 13일 미국인 기술자 M. J. Furechar씨에 의해 73m 착정을 끝내고 양수시험을 실시, 395㎥/일의 지하수 개발에 성공했다. 제주도에서 최초로 관정식 지하수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이 관정의 위치는 옛 북제주군 애월읍 수산리 1057번지(강희봉)이며 지난 1998년 주택을 신축하면서 원상복구됐다. 관정 개발사업은 지난 1969년까지 도내 58개소에서 실시되었는데 이 중 19개소에서 지하수 개발이 성공함으로써 중산간지역과 용천수 수원이 없는 중산간마을에 양질의 수돗물이 공급되는 계기가 됐다.

지난 1965년 우락기가 저술한 '제주도'책자에 1964년 당시의 물 이용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용천수는 모두 456개소, 봉천수 374개소, 심정 15개소, 수원지(용천수) 43개소로서 당시의 물 이용은 용천수와 봉천수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간이상수도로 개발돼 이용되었던 용천수는 도 전체적으로 31개소에 이르고 이들 용천수의 수돗물 생산량은 1일 1만3320㎥, 1일 급수량은 9385㎥, 급수 인구는 14만3919명으로서 1인 1일당 급수량은 65ℓ밖에 안 되는 매우 열악한 실정이었다

이 같은 급수량은 2010년 연간 총 급수량은 7309만5000㎥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며 1964년도 제주도 전체인구(31만8358명)의 약 45%밖에 상수도 혜택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추가적인 수원개발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제주시 도두동의 '오래물'을 비롯해 당시 미이용 중인 17개소의 용천수를 대상으로 6만1641㎥/일의 용수를 개발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됐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제주시 애월읍 수산저수지 전경. 수산리에서 도내 처음으로 관정식 지하수 개발에 성공했다.

제주도의 물 문제 해결의 전기가 된 것은 1967년 1월이다. 그 해 1월 10일 연두순시 차 내도한 박정희 대통령은 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지대의 수자원을 개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므로 예산상으로 무리는 있지만 무진장 물이 숨어 있는 한라산 고지대 특히, 어승생(Y계곡물)·구구곡·성판악수원 개발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미리 구상하고 있는 바를 직접 스케치하였는데 이 것이 제주도 수자원개발 기본구상도이다.

이 기본구상에 의해 1967년 4월 20일 건설부 직영사업으로 어승생수원 개발사업이 착수됐고 1968년에는 (주)우일설계공사와 (주)도화인터내쇼날에 의해 어승생 용수시설 급수관로 동부·서부지선 기본계획용역이 추진됐다.

이 용역에서는 강정천과 외도천 용수개발 기본계획수립까지 포함됐다. 어승생 수원개발사업에는 지난 1967년 6월 24일 국토건설단이란 이름으로 폭력배 500명이 공사현장에 투입돼 4개월간 공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어승생수원 통수식은 1969년 10월 12일 제주시 산천단에서 거행됐고 1970년 8월 공사가 완료되었으나 2차례에 걸친 저수지 바닥 함몰사고가 발생해 1971년 12월 16일까지 보수공사가 이어지면서 4년 7개월 28일 만에 저수용량 10만 6000톤의 저수지가 건설됐다. 제주도의 물의 혁명을 가져오는 대역사가 이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수 천 년을 두고 부녀자들과 애환을 같이 해왔던 제주 '물 허벅'은 역사 속으로 점차 사라져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저수지의 이름을'한밝저수지'라 명명했고 현재도 저수지 출입구에는'한밝저수지'라 새겨진 큰 표석이 세워져 있으나 언제부터인지'어승생 저수지'로 변경됐다.

▲도두동 오래물에서 더위를 식히는 아이들. 수원 개발 계획 수립 당시 미이용 용천수에 대한 조사도 이뤄졌다.

이어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용천수 상수원 개발과 지하수 관정 개발사업이 병행돼 추진되었다. 1971~1972년에는 제주시 외도천 수원개발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이어 강정천 용수개발사업은 1971~1975년까지 추진돼 제주시와 서귀포 지역의 용수난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

또 농업진흥공사에 의한 제주도 지하수조사가 1970~1971년까지 이루어지고 그 이듬해인 1972년부터 생활 및 농업용으로 이용하기 위한 다목적 지하수 관정 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979년까지 124공이 개발됨으로서 용천수 수원으로부터 급수가 불가능한 중산간마을까지 상수도가 보급됐다.

이와 같은 용천수 상수원개발과 관정 개발사업에 힘입어 지난 1985년 제주도의 상수도 보급률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99.9%를 기록했다. 물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지 3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만에 전국 최고의 상수도 보급률을 자랑하는 놀라운 성과를 이룩한 것이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4048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