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과 밭의 경계를 표시하는 제주밭담은 제주인들이 척박한 제주땅을 일구면서 쌓아온 지혜의 산물이다. 사진은 제주시 애월읍의 밭담. 강경민기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밭과 밭의 경계라고 기록농사 위해 밭의 돌 골라내며 생긴 산물로 추정
하늘에서 내려다 본 제주는 수많은 조각을 짜 맞춘 듯하다. 사방에 펼쳐진 검은 밭담은 섬이라는 덩어리를 잘게 쪼개며 구불구불 흐른다. 도 전역을 수놓는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경관으로 손꼽힌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밭담에는 제주인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오랜 옛날부터 지금의 농업활동을 연결하는 고리이자 척박한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아온 제주인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밭담의 유래와 역할
제주 전역을 잇는 밭담은 무수한 시간 속에서 형성돼 왔다. 켜켜이 쌓아올려진 돌 위에 시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그 규모가 점차 확대됐다. 고문헌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수 백 년 전부터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 역사는 제주농업의 시작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땅에 돌이 많고 건조해 본래 논은 없고 오직 보리·콩·조가 생산된다. 그 밭이 예전에는 경계 둑이 없어서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었다. 김구가 판관이 됐을 때에 백성이 고통 되는 바를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밭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문감' 내용을 인용해 제주판관 김구가 밭의 경계 표시를 위해 담을 쌓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구가 제주에 재직한 게 1234년(고려 고종 21)부터 1239년까지였으니 밭담이 형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은 "김구 판관은 농토를 뒤덮어 경작지를 침식하고 있던 돌 처리 방안을 고안해 냈다"며 "그 덕분에 땅의 경계표시가 가능해져 강폭한 무리에 의해 백성들의 농토가 잠식되는 폐단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진 관장은 제주지역의 돌문화 개척자인 김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1년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밭담의 역사는 제주 농업의 출발과 때를 같이 한 것으로 예상된다.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제주는 돌무더기가 산재하고 바람이 강해 농업활동을 하기엔 좋지 않았다. 농사를 지으려면 밭의 돌을 골라내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이 제주돌문화 개척자인 김구 선생을 기리며 세운 공덕비. 김지은기자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은 "사람들의 생활상이 수렵에서 농업으로 바뀌는 시기에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돌을 골라내기 시작한 것을 돌담의 시초라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라며 "전부터 이뤄지던 것을 김구 판관이 본격적으로 제도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농업활동 이어온 제주인의 지혜
제주 돌담 밭에는 거친 자연환경과 맞서 싸운 제주인의 삶의 역정이 녹아있다. 땀 흘려 가꾼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밭담은 소와 말, 그리고 강한 바람으로부터 농작물을 지켜주는 축조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방축' 기능은 밭담에 대한 기록을 담은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산에는 짐승, 들에는 가축이 있다. 천백 마리씩 무리를 이루어 다니는 까닭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돌담을 둘러야 한다. 사람이 사는 집 또한 으레 돌을 쌓아 높다란 담장을 만들어서 이에 돌담으로 골목이 이루어진다." '남명소승'에 언급돼 있는 것처럼 제주에서는 소와 말을 목장이나 들에 풀어놓고 길렀기 때문에 밭마다 담을 쌓지 않으면 우마로 인해 농사를 망칠 위험이 높았다. 농가에서 마소를 가둬 기르던 한반도와는 다른 제주의 목축문화를 엿볼 수 있다.
원나라에 의해 제주가 본격적인 목축지대로 변하게 된 13세기 이후에는 돌담의 방축기능이 한층 강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박경훈 소장은 "고려시대 때는 제주 동쪽과 서쪽 지역에 목장이 운영됐지만 조선시대 때는 10개의 국영목장이 제주 섬 주변을 감싸는 형태가 됐다"며 "그 과정에서 밭담이 도 전역을 빙 두르는 규모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밭담은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농업활동을 이어온 제주인들의 지혜의 산물이다. 조, 보리 등 씨앗이 날리지 않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사람들은 담을 쌓아 바람을 다스렸다.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증보탐라지'에도 돌담의 방축 기능과 함께 방풍 기능이 언급돼 있다.
#제주 밭담 역사성 지켜야
밭담은 거친 자연환경에서 제주농업을 지켜온 버팀목이었다. 섬을 뒤덮는 거대한 그물이 돼 바람을 걸러주며 제주인과 함께 수많은 시간을 숨 쉬어 왔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삶의 방식과 지혜가 녹아있는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된 밭담은 농업유산을 넘어서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으로서 제주의 미학을 대표하고 있다. 검은 현무암은 계절에 따라 땅에서 솟아나는 생명들과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이다.
박 소장은 "밭담은 제주민중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풍토의 산물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대규모 형성됐기 때문에 한 번 파괴되기 시작하면 짧은 기간 내에 복원하기 힘들 것이다. 이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보전과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강시영·강경민·김지은기자
[전문가리포트]제주 농업의 인클로저 역사
흔히 인클로저(Enclosure)라고 하면 세계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13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인클로저' 운동을 쉽게 떠올릴지도 모른다. 인클로저는 말 그대로 '울타리를 두르다'는 뜻이다.
세계적 관점으로 볼 때 제주는 섬 전체가 돌을 이용하여 인클로저화 된 보기 드문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의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돌담 경관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경작지의 돌담 경관은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제주에서는 경작지에 쌓은 돌담을 '밭담'이라고 부른다.
제주의 농업경관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밭담'이다. 오히려 제주인보다는 제주를 방문한 이들에게 '밭담'은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경관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 제주의 밭담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얼마나 존재하고 있을까? 다행히 제주에 다양한 연유로 거주한 사람들(관리, 유배인, 지리학자)은 그들의 남긴 문장 속에 제주 밭담의 독특함을 남겼다.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밭담의 유래를 알 수 있다. 밭담의 유래는 김구가 제주판관으로 재직시절(1234~1239년) 경작지에 경계가 없어 피해를 입은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쌓았다고 하고 있다. 또한, 남사록(1601년)에는 밭담이 축조 과정을, 남천록(1676년)과 남사일록(1679년) 그리고 독일의 지리학자 라우텐자흐의 코리아(KOREA, 1945년)에는 밭담의 기능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문헌에서는 밭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첫째로, 밭담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13세기에 제주의 농업환경 변화를 재조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둘째로, 밭담의 축조방식이 과거와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밭담이 농업활동에 있어 제주의 자연환경과 밀접하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밭담이 소유지 경계뿐 아니라 우마(牛馬)의 출입방지 및 토양·작물을 보호해 준다고 하고 있다. 이는 밭담이 한반도와는 다른 제주의 목축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기록상으로 볼 때 밭담의 역사는 유럽의 인클로저 운동 시기와 비슷하지만 제주의 선조들은 김구가 판관으로 부임하기 전에도 밭담을 조성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더욱이 제주 밭담이 유럽의 인클로저 운동과 달리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문화경관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농업 환경의 변화와 도시화 등으로 밭담에 대한 위협요인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 밭담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하고, 또 세계농업유산으로 등재 하고자 함은 그 동안 도민들이 잊고 살았던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강성기 월랑초 교사·제주대 초등교육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