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해송림, 제주숲을 살리자](2)제주산림의 수탈사

[잃어버린 해송림, 제주숲을 살리자](2)제주산림의 수탈사
"노목대수(老木大樹) 울창해 낮에도 컴컴"… 일제때 지속 훼손
  • 입력 : 2014. 01.16(목)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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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의 대표수종인 구상나무가 대량 고사하는 가운데 기후변화가 지속될 경우 금세기말 멸종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돼 체계적인 보존·복원이 시급해졌다. 사진은 항공에서 바라본 고사한 구상나무숲. 사진=한라일보 DB

고려 원나라 직할 당시 방목지 조성 등 대규모 파괴
1908년 산림법 제정 이후 일본인 점유 무더기 남벌

주목·눈향나무 등 희귀수종은 정원수·분재용 채취

20세기초 제주의 숲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05년 일본인 아오야기 츠나타로오(靑柳綱太郞)가 펴낸 '조선의 보고, 제주도안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라산의 남면에는 노목대수(老木大樹)가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운 삼림을 이루고 있다. 수목은 무진장이라고 할만큼 많다. 본도는 노임이 저렴할뿐만 아니라 강건한 우마가 유목되고 있는 것을 이용, 적당한 방법으로 반출하여 이를 즉시 여순(旅順, 중국 대련시, 청일전쟁때 일본군이 공략한 곳) 방면으로 수출하면 전후에 그 이익이 대단할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가 펴낸 제주산림 60년사(2006년)를 통해서도 과거 제주 숲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원래 제주도에 조성되었던 삼림은 현존하는 잔존 식생 등을 감안할 때, 저지대는 구실잣밤나무, 후박나무 등으로 구성된 상록활엽수림, 산록부에는 서어나무류, 졸참나무, 물참나무 등으로 구성된 낙엽활엽수림, 그리고 산정부에는 구상나무의 순림인 상록침엽수림이 우점하는 원시림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필요한 농경지의 확보, 방목지의 조성 등을 목적으로 인위적인 화입에 의해 산림이 계속 파괴됐다. 특히 고려 때 제주도가 원(元)의 직할지가 되었을 당시 원나라에 의한 대규모의 방목지 조성으로 인해 대면적의 산림파괴를 가져왔다.

한라산 원시림과 제주의 산림은 일제 강점기에 훼손이 가속화됐다. 그 증거가 '조선총독부 관보중, 제주록'에 일제에 의한 한라산 훼손사가 낱낱이 적혀있다. 향토사학자 김봉옥 옹은 "일제하에 한라산 원시림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개탄했다.

1908년의 삼림법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산림을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조림에 대한 규정이 없고 보호 역시 한국인에 의한 피해를 단속대상으로 했다. 이때 일본인들이 산림을 점유하는 단초가 됐다. 산림 소유자는 이 법 시행 후 3개월 이내에 지적과 면적의 견취도(見取圖)를 첨부해 제출하도록 했는데, 이 기간 내에 제출이 없으면 전부 국유화했다. 당시만 해도 산림소유 관념이 희박했던 때라 대부분의 산림이 국유화됐고, 결국 일본인들이 산림을 점유하는 계기가 됐다.

일제는 영림창(營林廠)을 설치하고 1911년에는 삼림법을 폐지, 삼림령을 조선총독부 제령 10호로 공포한다. 이 삼림령은 임목불하(林木拂下)에 한국인의 참여를 막았고 단속규정을 더욱 강화하는 내용이었다. 삼림령 및 부속 법규를 공포해 보안림 이용의 제한, 영림감독, 개간의 금지 제한, 국유림야의 보호, 국유림산물의 양여, 산림의 공동사업, 국유림야 및 산물처분 등 한국인을 제한하며 참여를 막았다.

한라산의 원시림은 1915년부터 1930년까지 16년동안 대대적으로 잘려져 나갔다. 당시 총독부는 영림서(營林署)를 두어 전국 산악의 삼림을 벌목, 무더기로 처분하기 시작한다. 1926년에 전라남도 제주도(島)에 제주도영림서를 설치, 관리해오다 1932년에 폐지되고 서울영림소 제주관리소로 축소됐다.

▲한라산의 최대 소나무 임지로 꼽히는 작은 두레왓의 울창한 적송림.



총독부는 한라산을 남북으로 나누어 사업구를 설치했다. 또 지역별로 북구는 제1임반에서 19임반으로 나누고, 남구는 제1임반에서 제22임반으로 각각 구분했다. 또 세부적으로는 그 내부를 소림반(小林班)으로 설정해 막대한 양의 임산물을 처분했다.

이 때 매각 처분된 수량이 총독부 관보에 기록된 내용만 1921년부터 10년간 42만8000여 그루에 달했다. 그 대상물도 구상나무, 주목, 때죽나무, 졸참나무, 비자나무, 흑송, 적송, 종가시나무는 물론 잡목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이었다.

광활한 산악지대는 표고 재배지로 임대되면서 표고 원료인 자목 벌목을 허가한 지역이 976만여평으로 1000만평에 육박했다. 이뿐이 아니다. 주목, 진달래, 단풍나무, 눈향나무 등 희귀수종들이 일본인에 의해 정원수나 분재용으로 공공연히 채취하도록 했다. 허가면적은 160여만여평에 달했다.

제주도지(1982)는 일제시대 후반기의 임정(林政)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33년부터 산림보호직원이 배치되고 매년 인원을 증원하여 민간에서의 연료나 가사용 목재의 벌채마저 금하였다.' 그러나 한라산의 활엽수림대의 주요 구성 수종인 서어나무, 졸참나무 등의 낙엽활엽수를 이용해 제탄을 만들어 일본으로 반출시킬 것을 계획해 관 주도의 벌채를 대규모로 실시, 산림의 황폐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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