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3)/제1부-성을 말하다 성곽을 거닐다](3)성은 살아있는 유기체다

[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3)/제1부-성을 말하다 성곽을 거닐다](3)성은 살아있는 유기체다
왜구 침입ㆍ홍수 등 위기극복 위해 진화를 거듭하다
  • 입력 : 2014. 02.05(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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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 확장 이전 제주성 모습(왼쪽)과 그 후 산지천 건너편으로 확장된 모습.

탐라시대 이후 부침 겪으며 생명력 유지
조선시대 들어서 지속적 보수·확장 거듭
탐라문화광장은 간성·중인문터… 규명을


아무리 견고하게 돌로 쌓은 성일지라도 천년을 지탱하기는 힘들다. 지속적으로 보수와 정비등 적절히 대응해 나가지 않으면 금세 폐허가 되고 만다. 성으로서의 기능과 존재이유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제주성도 많은 부침을 겪으면서 일제 강점기까지 굳건하게 버텨왔다. 제주성을 천년의 유산이라고 하는 이유도 탐라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탐라의 역사, 제주민의 애환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 제주성이다. 그런 점에서 제주성은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제주시 원도심인 무근성에서 출발한 제주성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보수와 확장을 거듭했다. 제주시 도심을 동서로 관통했던 산지천과 병문천은 훌륭한 자연해자였다. 그렇지만 당시 성곽의 구조와 규모 등을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제주성이 성곽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삼별초가 진도에 자리하자 고려정부는 1270년 9월에 김수에게 군사 200명을 주어 제주를 방비하게 한다. 이때 삼별초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같은 해 11월 이문경을 급파한다. 당시 이문경은 동제원(제주시 화북동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을 치기 위해 성주 고인단에게 제주성 성문을 열어 통과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고인단이 이를 거절하자 할 수 없이 성을 우회하여 동제원에 이르렀다고 기록돼 있다. 제주성 성곽이 굳건했음을 방증해주는 자료이다.

제주성이 언제 축성됐는지 구체적 기록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보수ㆍ확장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나타난다. 즉 1411년(태종 11년) 『태종실록』에 "제주성을 수축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때도 제주성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제주성 성곽의 규모가 처음 문헌상에 나타나는 것은 조선초의 기록이다. 세종 14년(1432년)에 편찬한『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제주목)에 둘레가 910보(步)라고 기술돼 있다. 이를 환산하면 약 1.13㎞로 추정된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제주성은 1㎞가 조금 넘는 자그만 성이었다. 이어 성종 12년(1481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4394척, 높이 11척으로 바뀐다. 이를 환산하면 대략 둘레 1.3㎞, 높이 3.3m의 성곽이었다.

관심을 모으는 것은 제주성에 해자도 이른 시기부터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1512년(중종 7년) 제주목사 김석철은 "제주성 주위에 긴 참호를 아주 깊게 파서 성문보다 낮게 하여 모두 널판으로 다리를 놓아 밤에는 들어 올리고 낮에는 깔아놓아 걱정 없이 방비하였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제주성은 시대흐름에 따라 차츰 웅장한 성곽의 틀을 갖춰가고 있었다.

제주성이 오늘날과 같은 성곽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곽흘 목사 때였다. 1565년(명종 20년) 까지만 해도 제주성은 동쪽으로는 산지천, 서쪽으로는 병문천을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었다. 산지천과 병문천이 동쪽과 서쪽의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때 곽흘목사는 산지천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동쪽 성, 즉 산지천을 따라 쌓은 성곽을 산지천 건너편으로 물러 쌓게 하였다. 왜 그랬을까.

▲1914년 지적도에 나타난 제주성을 항공사진에 표현한 모습. 산지천을 따라 간성이 연결되어 있고 원안은 중인문 위치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1555년(명종 10년) 6월에 왜구 40여척이 침입하여 1000여 명이 제주성 동쪽 능선에 진을 치고 공격하는 난리가 벌어졌다. 을묘왜변이 일어난 것이다. 왜구들은 동쪽 높은 곳에서 산지천 아래쪽 제주성을 내려다보면서 공격을 해댔다. 3일간 제주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자칫하다가는 제주성이 함락될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이었다. 이때 김수문 목사는 70여 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왜구를 격퇴시켰다.

곽흘 목사는 을묘왜란 당시의 경험을 떠올려 제주성을 산지천 건너 동쪽 높은 능선까지 확장하는 전략적 고려를 한 것이다. 지금의 제주지방기상청 일대까지 성을 확장한 것이다. 이때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은 제주성 안에 위치하게 된다. 길이가 약 3㎞에 이르는 오늘날과 같은 성의 규모가 이때 완성된 것이다.

이처럼 제주성은 사회적 불안기나 격변기마다 진화를 거듭하면서 천년의 유산으로서의 위용을 갖춰나갔다.

왜구의 침입만이 아니다. 곽흘 목사때 산지천 서쪽변의 성을 허물어 동쪽으로 확장하자 산지천이 성안으로 들어오게 되지만 이로 인해 홍수가 자주 발생했다. 가옥이 번번이 물에 잠기고 재산피해를 당하자 사람들은 옛 성을 따라 성곽을 다시 쌓기를 소망했다. 결국 김영수 목사는 1780년(정조 4년)에 범람을 막기 위해 산지천 변을 따라 성곽을 다시 쌓게 된다. 이른바 간성이다. 이때 쌓은 간성의 길이는 680여m, 높이는 약 2.7m에 이른다.

오늘날 간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일제 때 중인문과 함께 훼철됐기 때문이다. 1914년 지적원도를 근거로 제주성을 복원해 보면 산지천변을 따라 간성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제주도가 추진하는 탐라문화광장 부지가 간성터이자 중인문 자리에 해당한다. 탐라문화광장 조성과 맞물려 발굴조사와 함께 제주성 원형을 규명하고 천년의 유산으로 되살려내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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