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4)/제1부-성을 말하다 성곽을 거닐다](4)성돌마다 눈물과 한숨이

[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4)/제1부-성을 말하다 성곽을 거닐다](4)성돌마다 눈물과 한숨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제주성은 그렇게 태어났다
  • 입력 : 2014. 02.19(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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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단 일대에 정비돼 있는 제주성 성벽. 제주성은 탐라시대부터 이름없는 사람들이 동원돼서 쌓은 희생과 고통의 산물이다. 이승철기자 sclee@ihalla.com

성곽 구축 많은 물자·인력 필요
성을 쌓는 과정에 고통·희생 커
원망만 쌓인다고 하여 '원축성'
역사의 중심무대 역할했으나 무분별한 개발로 쇠락 거듭
역사문화자원의 미래가치 못 본 근시안적 도시계획에 도심 쇠퇴
성돌에 스민 눈물과 한숨 더해


성은 단지 돌로 쌓은 건조물, 성벽이라고 치부해서는 안된다. 돌담 하나하나에는 이름없고 힘없는 민초들, 백성의 눈물과 희생이 아로새겨져 있다. 무지렁이 같은 민초들일지라도 어찌 눈물과 한숨이 없었을까. 이름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이 있었기에 제주성은 모진 풍파를 견디며 1천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다. 그 의미를 온전히 되살려낼 때 제주성은 미래의 유산으로 더욱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성을 쌓는 일은 대역사였다. 엄청난 물자와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은 당연지사다. 동원된 사람들은 각기 공사구간을 정해 성을 쌓는 일에 나섰다. 공사 구간마다에는 돌에다 마을 이름이나 감독자의 이름 등을 새겨넣었다. 이를 표석이라 했다. 이름을 새기는 일은 성을 쌓는데 기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목적은 성이 무너질 경우에 누가 쌓았는지 책임소재를 가리는 데 있었다.

실제로 성이 자주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자 조선 세종 때는 축성에 따른 상과 벌을 제도화 하기에 이른다. 즉 5년 안에 성이 무너지지 않은 경우에는 승진을 시켰고, 1000척 이상 무너지는 경우에는 죄를 논해 벌을 내렸다. 1000척 이하가 무너진 경우에는 죄를 주지는 않더라도 상을 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는 묵인해줬다는 이야기다.

제주성도 천년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성을 고쳐쌓고 확장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 많은 인원이 동원됐고 온갖 고초를 겪었다. 상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제주성에서 다른 지방에서처럼 이름 등이 새겨진 표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표석이 없었다기보다는 성벽 대부분이 훼철되면서 원형 구간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제주성을 축성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는 문헌을 통해서 가늠할 수 있다.

'남사록'(1601년)에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백성들이 아주 고생하였고, 죽은 자도 열 두세 명이나 된다. 지금까지 고을 사람들은 축성하며 원망만 하였다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한 두 줄에 불과한 단편적 기록이지만 추운 겨울에 공사를 시작해서 백성들이 고생이 컸고, 죽은 사람도 여럿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원망만 쌓인다고 하여 원축성이라고 했을까. 얼마나 배고픔에 시달렸는지 인분마저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성을 쌓는 과정에서의 고통뿐만 아니다. 홍수 등 자연재해도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1408년(태종 8년)의 기록이다.

'태종실록'에 "제주에 큰 비가 내려 제주성에 물이 들어 관사와 민가가 표몰되고 화곡(禾穀)의 태반이 침수되었다"고 나타난다. 관사와 민가가 큰 피해를 입을 정도의 대홍수에 제주성이 온전할 리 없다. 대홍수의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3년 뒤 조정에서는 제주성을 고쳐쌓도록 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성을 쌓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제주민들은 일상적으로 동원됐다.

그뿐이었을까. 격변기마다 제주성은 역사의 중심무대였다. 1901년 신축항쟁(이재수난)이 대표적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성은 요새처럼 굳건했다. 제주성을 사이에 두고 민군과 관군이 대치했다. 이때 성문을 열어준 것은 무녀와 기생들이었다. 이에 힘입어 이재수는 민군을 이끌고 제주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는 "양인을 토벌하고서 제주성을 회복하였다"는 말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성벽은 훼철되기 시작했지만 제주성은 탐라시대 이래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권력의 중심이었다. '성안' '성내' '모관' 등은 제주성이 자리했던 원도심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일제가 허물어버렸지만 '동문' '서문' '남문' 등의 지명도 여전히 쓰인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성안'은 최고의 번화가요 사람과 물자의 집합체였다. 즉 제주성안과 제주성 밖은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다. 예전에는 '성안' 간다고 했을 때 시골어린이들은 막연한 동경심을 가졌다. 성안은 다른 세계로 여전히 인식되고 있었다. 아니 그러한 인식이 은연중에 남아있었다고 할까.

그렇지만 화려했던 시절은 가고 쇠락을 거듭하고 있다. 무분별한 도시계획은 결국 제주성 남문과 동문 일대를 중심으로 얼마간 남아있던 성돌마저 사라지게 했다. 성돌 하나하나에 스며있던 제주인의 한과 눈물의 자취도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원도심은 다시 번성을 누리고 있을까. 최근 제주발전연구원의 연구결과 제주시 다른 지역에 비해 일도1동, 삼도2동, 건입동 등 원도심 지역의 도시 쇠퇴화가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역설적으로 원도심 지역의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도심재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제강점기와 도시개발과 확산과정에서 사라진 성곽을 정비하고 건물지 등을 복원해 원도심의 활력을 찾자는 것이다.

원도심의 쇠퇴화를 가져온 배경엔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다. 그 가운데 역사문화자원의 미래가치를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 도시계획도 도심 쇠퇴화를 불러오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스러져가는 성돌에 스며있는 눈물과 한숨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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