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13)/제3부-돌하르방은 어디로 갔나](1)제주성과 함께 하다

[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13)/제3부-돌하르방은 어디로 갔나](1)제주성과 함께 하다
권력 중심 제주성 동·서·남문 설치… 원위치 1기도 없어
  • 입력 : 2014. 06.25(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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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 동문 앞 골목길에 세워진 돌하르방으로 뒤에 성담이 보인다.(제주100년 수록 사진)

지배 이데올로기·민중 염원 결합 산물
가장 제주적 조형물 불구 뿔뿔이 흩어져

탐라시대 이래 천년을 이어온 제주성은 일제 강점기에 본격적으로 훼손되고 철거되기 시작했다. 성벽과 성의 주요 건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남문과 동문, 서문은 물론 산지천변의 중인문 등이 허물어졌으며 공신정 등 제주성의 주요 누각들도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제주만의 독특성을 보여주던 칠성대 등도 없어지고 말았다.

일제는 제주성을 허물고 그 성돌을 바다 속에 던져 넣음으로써 탐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제주의 정체성을 훼손했다. 성곽이 사라지면서 도로가 뚫리고 전통적인 역사경관을 무시한 왜곡된 근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났어도 제주성의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근대화, 산업화와 함께 도시가 팽창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성벽마저 파괴돼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일제는 정략적 의도에 따라 제주성을 제멋대로 유린했다. 반면에 광복 이후의 제주성 수난은 우리 사회의 무지와 무관심, 개발에 따른 탐욕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가 제주성과 함께 했던 돌하르방의 수난이다. 돌하르방 역시 제주성과 함께 해온 가장 제주적인 돌조형물로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돌하르방은 원래 제주성 동문ㆍ서문ㆍ남문 앞에 서로 짝을 이뤄 마주보며 세워졌다. 성문과 짝을 이루던 수호신이다. 또한 정의현과 대정현에도 각각 12기씩 있었다. 제주목의 23기를 포함해서 모두 47기가 세워졌다.

그런데 오늘날 제주성 동문ㆍ서문ㆍ남문지 제 위치에 남아있는 돌하르방은 하나도 없다. 성문이 남아있지 않은 마당에 돌하르방이 온전히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돌하르방은 제작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김석익의 『탐라기년』에는 1754년(영조 30년) 김몽규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돌하르방의 일반적인 이름은 우석(성)목, 벅수머리, 옹중석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1950~60년대 이후 불려지다가 1971년 제주도 지방민속자료(제2호)로 지정되면서 공식화됐다. 정확한 제작시기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적어도 400년 가까이 제주성과 함께 한 것이다.

왜 제주성 동문ㆍ서문ㆍ남문 등 삼문 앞에 돌하르방을 세웠을까.

관덕정을 지키고 있는 돌하르방. 이 돌하르방도 원래 다른데서 옮겨진 것이다. 강희만기자

돌하르방은 중국 진시황때 거인장사로 흉노족 등을 물리친 완옹중의 석상을 수호신격으로 제주성 앞에 세웠다고 한다. 당시 숙종ㆍ영조대에 잦은 흉년과 전염병이 돌자 이를 막기 위해 완옹중의 석상을 만들어 성 밖에 세웠다는 것이다. 돌하르방이 옹중석 등으로 불린 것이 이 때문이다. 제주목사가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 비춰보면 권력자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민중들의 염원이 결부된 산물이 바로 돌하르방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돌하르방은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기원하는 수호신적 기능이나, 주술ㆍ종교적 기능과 함께 도읍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거나 사람들의 함부로 출입을 막는 금표(禁標)의 구실을 한다. 제주목의 성문 입구와 정의현, 대정현의 입구에 세워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제주목관아를 둘러싸고 있는 제주성은 탐라시대 이래 지방 권력의 중심이었다. 제주성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제주 역사와 함께 부침을 거듭해왔다. 물난리로 인해 가옥이 침수되는가 하면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많은 수탈과 희생을 당해야만 했다. 돌하르방에는 이러한 애환과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염원이 담겨 있기도 하다.

제주는 1416년(태종 16년) 1목 2현의 3읍체제로 공간 분할이 이뤄진다.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이 각각 그 지역을 관장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심은 제주목이었다. 제주목은 오랫동안 지방 권력과 정치의 중심지로서 위상과 기능을 유지해 왔다. 이런 상징성 때문인지 제주성의 돌하르방은 정의현이나 대정현에 비해 훨씬 컸다. 제주목의 돌하르방 크기가 평균 181.6㎝에 이른 반면 정의현은 141.4㎝, 대정현은 136.2㎝ 정도로 작다.

이처럼 제주성을 이야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돌하르방이다.

돌하르방은 오늘날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아이콘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1991년 제주에서 개최된 한ㆍ소 정상회담은 냉전의 벽을 허문 역사적 회담으로 기록된다. 이때 옛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에 돌하르방이 전달돼 세계의 이목이 쏠리기도 했다. 이후 돌하르방은 제주시와 자매결연을 한 미국과 독일, 중국, 일본 등 4개국 10개소에 세워질 정도로 제주문화를 알리는 사절단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돌하르방은 제주성과 함께 할 때 온전히 빛을 발한다. 제주성 정비 복원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 돌하르방의 제자리 찾기 역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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