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17)/제4부-옛길을 탐하다](3)과거의 길, 현재의 길(하)

[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17)/제4부-옛길을 탐하다](3)과거의 길, 현재의 길(하)
일제 신작로 개설 등으로 전통 도로체계 해체되기 시작
  • 입력 : 2014. 08.20(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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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둣(뒷)골 일대의 골목길.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너비 1~2m 정도 되는 길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주고 있다. 강희만기자

고유성 지명 공간적 특징 무시 마구잡이식 도로개설은 침탈위한 일제 식민지배의 산물
근대화 이전까지 유지되던 길의 골격 차츰 사라지고 신작로 따라 공간변화도 초래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도로체계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일제가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통치하기 위해 신작로 건설에 나선 것이다. 신작로는 대륙침략과 물자 등을 수탈하기 위한 일제 식민지배의 산물이다. 일제는 1910년대 초반까지 주로 항구와 주요지점을 연결하면서 전국에 걸쳐 800여km에 이르는 신작로를 개설했다. 이로 인해 근대화 이전까지 유지되던 길의 골격과 전통경관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도 여지없이 신작로가 뚫리기 시작했다. 신작로의 개설은 곧 길의 변화가 시작됨을 의미했다. 지형에 따라서 혹은 거주 공간 따라 생겨났던 길이 대부분 사라지고 건물이 헐린 자리에 번듯한 도로가 개설된 것이다.

근대화를 겪기 이전 옛길은 큰 변화없이 기본골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제주성과 성문 및 건물이 본격 파괴되기 전까지 성 안의 길은 큰 변화가 없었다. 19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제주성 안은 전통적인 도로체계가 잘 남아있었다.

반면에 일제에 의한 근대화 시기의 길은 모두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연결해 나갔다. 대표적인 예가 북신작로의 건설이다.

제주시 북초등학교 일대. 이곳은 객사인 영주관이 자리했던 곳이다. 영주관 건물을 활용하여 1908년 북초등학교의 전신인 제주공립보통학교가 총물당(옛 제주대학교 건물 앞)에서 이전했다. 제주목관아가 자리하는 등 제주성의 중심공간답게 남문으로 향하는 큰 길도 이곳까지 연결됐다.

북신작로는 이곳 제주성의 중심공간에서 산지천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성 안에는 오랫동안 유지돼온 도로체계가 상당부분 남아있었다. 하지만 북신작로는 전통적 형태의 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제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도로였다. 도로 폭은 약 7.2m를 유지하도록 설계됐다. 일제가 1914년도에 제작한 지적원도를 보면 길게 뻗은 북신작로가 표시돼 있다.

북신작로 이외에도 제주성 안에는 신작로가 더 있었다. 제주성 동문에서 산지천을 거쳐 관덕정과 서문까지 이어진 도로가 그것이다. 이 신작로를 뽑기 위해 일제는 동문과 서문을 없애고 말았다. 제주성의 기존 도로체계를 완전히 허물고 새로 뽑은 도로가 신작로였다. 신작로를 중심으로 일본인 시설이 집중되는 등 공간의 변화도 가져온다.

신작로는 제주성 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제는 1912~1913년에 섬을 순환하는 일주도로 건설에 나섰다. 북신작로는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도로에 편입되는 토지와 건물은 무조건 기부하도록 했다. 신작로에는 이처럼 일제 식민지배의 본질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일제가 건설한 북신작로 모습. 일제 당시 제주성안의 중심도로 역할을 했으나 현재는 원도심 침체와 맞물려 활기를 잃고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된 근대화 시기의 도로는 옛길과는 이질적이다. 고유성이나 지명, 혹은 공간적 특징을 무시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근대화 시기 이전의 옛길은 단순히 도로로서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다. 옛길에는 이름과 관련된 공간적 정보와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다. 옛길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역사와 정신, 삶의 흔적들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북신작로 아래 작은 골목은 해짓골이다. 해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못이 있어서 해짓골이라 했다.

제주목관아 뒤편 일대는 영둣골(영뒷골)로 불렸다. 제주목관아와 관덕정 등 관청 건물 뒤에 위치한 동네라는 뜻이다. 현재도 영둣골 일대는 폭이 1~2m 되는 옛길이 사방으로 뻗어있다. 제주시내에 이 같은 옛길이 어떻게 남아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다. 이 길은 넓고 화려한 도로와 연결된다. 그렇지만 옛길을 오가던 사람들은 차츰 떠나고 허름한 주택들 사이로 듬성듬성 보이는 집터에선 옛 영화를 찾아보긴 힘들다.

제주동부경찰서 중앙지구대 일대는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일대에는 비명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곳서부터 창신골까지 이어진 골목길을 옥길이라 했다.

창신골은 제주목관아 사무실 앞에서 탑동으로 내려가는 칠성로 입구에까지 이르는 골목길이다. 끝자락에는 면암 최익현의 적거표식이 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오랜 집정에 반기를 들고 성토했다가 1873년(고종 10) 제주에 유배됐다. 창신골 일대에 적거지가 있었다. 최익현은 1875년까지 2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며 '유한라산기'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제주성에는 성굽길이 남아있다. 성굽길은 남문로터리 동서쪽과 무근성 일대 및 북성 일대 등 거의 제주성을 둘러싸고 구불구불한 형태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성굽길이 해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제주성은 산지천과 병문천이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했지만 성굽길도 성곽의 방어기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향교와 관련한 옛길도 남아있다. 오늘날 동문로터리 일대에서부터 칠성로 입구까지의 도로는 생짓골이라 했다. 생짓골은 향굣골의 방언형이다. 향교가 있었던 마을이라는 데서 이같이 불렸다.

이처럼 옛길은 그 자체가 과거부터 이어진 삶이요, 역사이자 공동체였다. 옛길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고 아픈 역사까지 녹아있다. 통행을 위한 단순한 길만도 아니고, 현재와 단절된 과거의 길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비록 상당 수가 소멸되고 단절되거나 변형됐음에도 불구하고 옛길은 여전히 도시의 일부로서 살아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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