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보목동 섶섬 구두미 프리마켓. 풍광이 빼어난 제주섬 곳곳에 아트·플리마켓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사진=서귀포시 제공
풍경 좋은 섬 곳곳에 월·주 1회 아트·플리마켓 잇따라SNS시대에 속도 줄이고 사람이 만나는 소통 공간으로
춘삼월이라고 하지만 바람이 매서웠다. 태풍이 제주섬에 상륙할 때면 흔히 '집채만한 파도가 방파제를 덮치고 있다'는 식의 뉴스가 단골로 등장하는 동네다. 바람이 대수랴, 범섬이 보이는 포구 앞에 하나둘 모여든 이들은 그런 날씨에 익숙한 듯 보였다. 바닷바람을 등에 지고 자그만 테이블을 펼치거나 맨바닥에 앉아 가져온 물건들을 차분히 진열하기 시작했다.
▶해녀마을에 매달 소란한 놀이장터=지난 9일 서귀포시 법환동 해녀상이 있는 광장. 좀녀마을로 불리는 이곳엔 한 달에 한 번 장이 선다. 지난해 3월부터 운영되고 있는 '소랑장'이다. '소랑'이 '사랑'의 제주방언이라며 붙인 이름인데, '소란한 놀이 장터'란 애칭이 따른다.
이날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이어진 소랑장엔 아이들이 갖고 놀던 인형에서 뜨개질 소품까지 소박한 상품들이 나왔다. 떡볶이, 열무김치 등 먹거리도 빠지지 않았다. 벼룩시장이면서 아트마켓이다. 20여팀의 셀러(판매자)중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소랑장을 지켜온 이들도 있었고 인터넷에서 법환동에 장이 선다는 정보를 보고 향초를 만들어 처음 참가했다는 젊은 직장 여성들도 만났다.
몇가지 음식과 쓰던 물건을 준비해온 손미숙씨는 "소랑장은 재미와 나눔이 있는 곳"이라며 "먼저 온 순서대로 편한 곳에 자리잡아 하루를 즐기면 된다"고 말했다.
해녀마을인 서귀포시 법환동 소랑장 풍경. 1년여동안 운영해온 소랑장은 이즈음 동네 사람들과 가깝게 소통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사진=서귀포시 제공
▶문화 다양성 담은 이색 볼거리=소랑장은 몇 해 전부터 제주섬 경치 좋은 곳에 생겨나고 있는 플리마켓이나 아트마켓 중 하나다. 서귀포시 지역만 해도 섶섬 구두미 프리마켓, 대평리 소소장, 오조리 일출반달장, 동드레 순수문화장터 등이 있다. 그동안 재활용품이나 아트 상품을 사고파는 아트·플리마켓이 제주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개성넘친 이름을 가진 장터도 그만큼 많아졌다.
이는 제주에 둥지를 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꾸려진 제주도 읍면 마을의 장터가 입소문을 타면서 아트마켓이나 플리마켓이 제주 이주의 새로운 경향으로 알려진 영향이 크다. 이름난 장터들은 한때 '이주민들끼리의 커뮤니티'로 여겨졌다. 이주민들이 제주 자연을 무대와 객석으로 삼아 저마다 준비해온 물건을 펼쳐놓았더니 한 편의 '작품'이 되어버렸다.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색 구경거리가 됐다.
제주에 정착한 주민이거나 섬을 스쳐가는 여행객들은 오일장에서 제주섬 사람들의 일상을 만나듯 제주 곳곳 날짜를 달리하며 주 1회, 월 1회 등 개설되는 아트마켓이나 플리마켓에서 섬의 풍광과 마주하며 잠시 삶의 쉼표를 찍는다. 몇 천원 정도만 손에 쥔 채 반나절을 보낼 수 있는 곳도 흔치 않다.
▶"제주사람으로 함께 살아갈 길"=서귀포시에 둥지를 틀고 소랑장 진행자로 활동해온 김명지씨는 아이들이 사용하던 장난감, 신발, 옷가지 등을 들고 판매자로 나서는 날이 많다. 원하는 이들은 누구든 그만의 방식으로 장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서다. 이즈음 이주민을 넘어 동네 사람들과 더 가깝게 소통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는 그는 "소랑장을 매개로 지역과 공감대를 키우고 제주 사람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비쳤다.
아트마켓이나 플리마켓의 성장은 한편으로 역설적인 면이 있다. 장터에 관한 여러 소식이 오가는 곳은 SNS나 인터넷 블로그·카페가 주를 이룬다. 얼굴도 모른 채 온라인을 통해 정보를 얻은 이들이 결국은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 소통하는 셈이다.
또다른 내일을 살아갈 힘은 결국 사람인 걸까. 팍팍한 대도시의 하루를 접고 제주행을 택한 이들은 SNS로 안부를 묻다가도 비슷한 마음을 안고 제주에 짐을 풀어놓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장터로 향한다. 치솟는 땅값, 자고나면 새로 지어진 건축물에 멀미날 것 같은 제주에서 그래도 속도를 줄이게 하는 장소가 그곳일지 모른다.
제주섬 아트·플리마켓 ‘대세’
대기업서 기획한 장터까지 개설
지역공감 지속 가능한 ‘장’ 과제
아트·플리마켓이 대세인 걸까. 최근에 생겨난 어느 장터는 제주에서 대형 관광시설을 운영하는 대기업이 기획했다. 업체 이름을 내세우진 않았지만 장날이면 판매에 필요한 테이블, 의자, 그늘막 등을 제공해준다. 해당 기업은 지난 1년간 도내외 아트·플리마켓 현장을 꼼꼼히 누빈 후 지난 4월부터 장터를 개설했다. 아트·플리마켓이 특색있는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새로운 문화사업으로 장터에 참여하는 창작자 등을 지원하고 있다.
제주섬 아트·플리마켓 언제, 어디서 열릴까. 서귀포시에서 펴내는 계간 '희망 서귀포' 최근호 자료를 토대로 제주지역 아트·플리마켓을 소개한다.
서귀포시엔 토·일요일 주말마다 서귀포예술시장이 열려 이중섭거리의 또다른 풍경을 빚어낸다. 이주민이 지핀 장터 열풍 이전에 탄생한 도내 플리마켓의 원조로 알려졌다. 법환동 소랑장(둘째주 토요일), 보목동의 섶섬 구두미 프리마켓(마지막주 토요일), 대평리 소소장(첫째주 토요일), 오조리 일출반달장(첫째·셋째주 일요일), 성산읍 섭지코지 동드레 순수문화장터(첫째주 일요일) 등도 찾아보자.
아트·플리마켓에서 나온 소박한 물건들.
제주시에서는 매월 셋째주 일요일 칠성로 문화카페 왓집 주변에서 멩글엉폴장이 열린다. 토요일엔 구좌읍 세화해변 주차장에서 세화 벨롱장이 선다. 셋째주 일요일에는 제주시청 일대에서 도깨비장터 '심심한 밤 배고픈 밤'을 만날 수 있다. 반짝반짝 착한가게(애월읍 장전리), 벼룩시장 놀맨(애월읍 애월리), 고산리 재주장터(한경면 고산로), 이도1동 모흥골 호쏠장(삼성혈 맞은편 소공원)도 제주시에 흩어진 아트·플리마켓이다.
제주에 문화 장터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그늘'도 있다. 저마다 튀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판매 물건은 비슷하다는 점이다. 장사에 방해가 된다는 지역 주민들의 원성이 이어져 장소를 옮긴 사례도 있었다.
섶섬 구두미 프리마켓에 관여해온 이은숙 전 보목동부녀회장은 "주변에서 좀 더 특색있는 장을 만들어보자는 고민을 많이 한다"며 "부녀회 등 지역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경우 판매품도 다양해지고 관심도 지속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법환마을에서도 주민 참여 방안을 궁리하고 있다. 소랑장에서 만난 이재은 대륜동장은 "마을과 연계해 소라젓 판매 등 해녀마을의 특성을 반영한 장터가 되도록 마을회와 함께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