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실칼럼] 상선약수 그 또한 인간의 길

[고경실칼럼] 상선약수 그 또한 인간의 길
인문학에 길을 묻다<8>
  • 입력 : 2015. 08.28(금) 16:49
  • 뉴미디어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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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소슬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창문을 열었다.

 필자의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어제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딘가 서늘한 물 기운이 느껴지는 물컹하는 그 맛 ..... 아! 어느새 가을 초입에 들어섰구나 하는 시간의 변화와 그 흐름을 같이하는 바람의 향기를 고스란히 육체 속의 영혼에 전달하고 있다.

 베란다공간에서 뜨거운 여름을 이겨내며 수줍은 듯 핀 난초들의 생명력 속에는 아내의 정성이 소박하게 묻어있어 그 향기가 더하는 듯싶다. 물줄기의 흐름에 따라 '세상 만물이 형태가 그 모습을 구현하는 것인가'하는 의문을 품은 눈으로 난초꽃망울과 마주하고 있다.

노자의 상선약수의 의미는

 간밤에 읊조리던 노자란 철학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단어가 뚜렷해진다. 이 말은 '상급으로 좋은 것은 물과 같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우리가 바라보는 물은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늘 낮은 곳을 지향하고 있다. 물은 사람들이 더러워하거나 무서워하는 어떤 환경도 기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물은 만물의 생명의 원천이 되고 만물의 아픔을 치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면서 어느 것하고도 다투거나 앞서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생명을 창조하고 성장시키고 우주를 생성케하는 원천이 된다.

 그래서 철학의 창시자라는 탈레스도 '인간은 물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어떤 그릇, 어떤 환경 또는 어떤 조건이 되어도 물은 적합하게 조화를 창조해내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온갖 쓰레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물은 정상화를 향해 끊임없이 그리고 조용히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이 살아서 소리를 알아듣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한 그것을 만들어내는걸 모르고 무심코 지나는 경우가 많다. 물속에 기의 에너지가 온갖 조화로운 모습으로 발현되는 것을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함부로 대하다 온갖 재앙을 당하기도 한다.

 물에 대한 연구를 해온 일본의 '에모투마사루'라는 사람은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통해 물이 생명이 있음과 심미적 성격을 찾아내서 보여주었다. 그의 실험 방법은 첫 번째로 물을 컵에 담고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등으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후 급 냉각시킨다.

물은 살아서 소리를 알아듣는다?

 이때 얼음 속에 새겨진 구조는 육각형의 아름다운 구조를 만들어냈다. 두 번째는 첫째와 반대로 물 컵에 '죽일 놈'등 험악한 욕을 한 후 위와 같은 방법으로 촬영을 해보니 그 구조는 흙탕물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은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했는데 그 유사점은 거의 같은 현상을 보인 것이다.

 물론 전문가들이 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하겠지만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바람과 태양도, 내 몸을 만들고 있는 물도 모두가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은 '기'라는 에너지를 통해 형상을 만들었을 때 사람이니 꽃이니 하는 분별력 있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만물에 흐름... 이것이 원대한 자연이란 섭리가 아닐까 싶다.

 중용에서는 이러한 섭리가 세상환경에 적응하면서 구현할 때 '희·노·애·락'이란 칠정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단이라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이란 감성을 건드리면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착한 본성으로 발현되기도 한다고 한다.

 새벽녘 정원 풀잎에 대롱대롱 매달려 반짝이고 있는 이슬 한 방울도 엄청난 물길이 도도하게 흐르는 양쯔강이나 한강의 물도 다 무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력을 원천으로 유무상생(有無相生)의 긴장감 속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옮겨다 놓고는 지나치거나 소홀하거나 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 그 덧에 아픔을 겪는다.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고 하면서 인간들이 무엇을 정의하고 그것에 답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답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우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겉으로는 늘 한결같은 바위덩어리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변화하고 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내가 지금 이것이 답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변화해버린 것이다. 이 모두가 물이 흐름과 무엇이 다름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검정고무신 신고 학교 다니던 어린소년이 이제 무서리가 내리는 머리를 숙이며 잔털이 뽀송뽀송한 어린아이였던 모습을 그리워한다. 한시도 멈추지 않은 삶에 신장로를 달려온 후의 모습이다.

물줄기를 바라보며 만물의 생명력을 공유하며 살아왔나

 나는 얼마나 감사하다는 진심을 느끼며 살아왔을까. 나는 만물의 생명력에 대한 고마움을 얼마나 진정으로 공유하며 살아왔던가. 도도히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그 물방울마다의 소리를 들으려는 숨죽인 소통의 정성은 얼마나 기울였다는 말인가.

 
2500년 전 살았던 위대한 철학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지혜를 내 삶에 어떻게 통섭했는지를 통찰해보면 한없는 게으름 속에 그렇게 흐르고 흘렀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초가지붕 처마 끝에서 낙수 물이 뚝~뚝 떨어지면 군불 땐 방에서 턱을 고이고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던 소년에 낭만은 ....... 오늘 아파트 베란다에서 얼마 안 되는 난초들과 마주하면서 시간과의 줄타기 속에서 애초에 꿈꿨던 아름다움을 느끼는 여유마저 잊어버린 채 마라톤 선수처럼 달려왔던 기억을 쌓아둔 변변치 않은 한자락 인생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이다.

 대우주의 생명력, 창조력을 동경하며 미래를 조망하는 세포가 되어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내일은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가득 채워진 흙탕물을 비워내는 생각의 공간에서부터 노 철학자의 비움의 지혜를 느껴 보면서 물에서 길을 묻는 지혜를 증득해야할 듯싶다.

낮은 곳을 지향하며 포용하는 지혜를 터득하자

 이제 물이 순환괘도를 따라서 유영하듯 천천히 산책길에의 소소한 즐거움을 느낌으로서 만물의 생명력과 소통하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천천히 뜨거운 아침햇살이 영롱한 아침 이슬을 증발시키고 있다. 그 끝은 어디일까.....낮은 곳을 지향하면서 만물을 포용하는 이 또한 우리에게 길을 찾아주고 있음을 본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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