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실칼럼] 비움과 채움의 담론

[고경실칼럼] 비움과 채움의 담론
인문학에 길을 묻다<12>
  • 입력 : 2015. 10.01(목) 18:19
  • 뉴미디어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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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객들이 온 들판으로 쏟아져 나왔다. 최근에 새로 나온 벌초기계들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한밭건너에서 풀벌레 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칙칙 잘려져 나간 각종 잡풀 속에서 고소한 비움의 향기가 난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겪는 일들이지만 사람도 나이테를 더해가면서 계절의 순환에 대한 사유가 깊어지고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무덤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영혼이 있다면 현대의 이 모습을 어떤 심정으로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어본다.

 대지의 채움은 가을에 비워진다

 가을은 비움의 계절이다. 봄에 시작된 대지의 채움은 여름에 절정을 이루고 가을이 되면서 자연의 순환 원리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비워내기 시작한다. 채움만을 위해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욕망에서 비움이란 말은 문득 생소하거나 신선한 가을바람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법정스님 같은 분이 무소유를 소재로 자연의 순환을 보여주었을 때 우린 열광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노자 도덕경에 이런 글귀가 다가온다.

 '시위무상지상(是謂無狀之狀) 무물지상(無物之象)'

 '모습 없는 모습이요, 물체 없는 형상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중국의 '왕필'의 해석을 빌면 '없다고 말하려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고, 있다고 말하려하면 그 형체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모습 없는 모습이요, 물체 없는 형상이라 한 것이다.

 도올선생의 해석을 보면 '모습이 없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모습이요 그것이 곧 모습이 있는 것이다. 유(有)와 무(無) 어느 일극에 치우칠 수 없다. 이것은 현대 양자 역학의 이론들이 말하는 여러가지 현상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게 될 수 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말은 또한 불가의 대장경이나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인 '색즉시공(色卽是空)공즉시색(空卽是色)'의 의미와 같은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성철스님께서 말씀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의 법어와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가을이 와서 대지를 비운다는 말은 겨울의 혼돈의 시간을 거처 봄에 이르러서 다시 대지를 채우려함이라는 변화와 순환의 현상을 깊이 들여다봄에서 도두라진 의미라는 말이다. 항아리에 물이 가득 고여 있으면 더 이상 채울 수 없다.

 가득 차 있는 인간들도 욕망을 버리고 비우는 미덕을

 우리 인간들도 가득 차있기에 비우지 않으면 자기의 욕망에 집착하게 되고 여기서 순환은 멈추게 되는 것이다.

 비록 불가에서에만 통하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 요한복음에서도 유대인의 유력한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한말에서 같은 의미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어떻게 진리를 만날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는 '너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은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말이 아닌 인간들을 속박하고 있는 구시대 지식으로 가득 찬 정신세계를 비우고 새롭게 예수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로 채워야 한다는 의미라고 도올선생은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동서양의 현자들이 같은 세상을 보는 지혜의 빛이 있음에 공감했다.

 우리는 태어나서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양의 지식을 온전하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파편적이거나 편파적으로 습득하고는 여기에 매몰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부질없이 살다 비애를 느끼며 사라져가곤 하는 것이다. 지식과 지혜가 다르다는 사람도 있다. 온전한 지식이 아닌 편협 된 지식을 앎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만물'은 움직이며 생명을 유지하고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으면 썩어버리고 만다. 컵에 물을 담아서 몇 일간 놔두면 부패하게 된다. 비어있으면 그 물은 썩지 않는다. 썩을 물이 없다. 가득 차 있으면 움직일 수 없다. 고요함은 소란함을 포용했을 때 고요함이 온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껏 전개해온 담론은 비움과 채움이 순환의 원리 속에서 비움이 비움으로 극에 이르도록 인위적인 구속을 가해서도 안 되고, 채움 역시 채우고 또 채워 나가는데 급급해서도 안 된다는 근본적 이유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살았다 싶으면 가득 채워진 내 마음에 골동품들을 비워내고 한결 가벼운 그릇이 되어 새로운 생명의 빛을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골동품을 비워내고 생명의 빛으로 채우는 사고가 필요한 때

 불가에서는 모든 중생은 불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자각하여 본래의 비어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무한대의 행복 속으로 침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도 모든 인간들은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심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고 있고 그 로고스의 불씨가 지펴지면 하나님의 진리에 천국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 아닌가 싶다.

 
작은 지식파편에 속박되어 자신만이 최고라는 세계 속에서 허덕거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이제 사유의 시간 공간 속에서 비움과 채움의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우주의 순환성, 리듬성에 귀 기울여 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 땅에 누워있는 조상들의 집을 청소하는 자손들인 우리는 생명의 순환 속에서 지금 나를 찾는 지혜의 손을 잡아볼 것을 권해본다.

 끝으로 노자해설집에 책장을 덮으면서 도올선생이 감동받았던 함석헌선생님의 시를 옮겨본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맡기며 마음놓고 갈만한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죽어도 너희세상 빛을위해

 

 저만을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웃고 눈을 감을수 있은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머리 흔들 그 흔한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또한 소망이지만 나의 삶에는 구더기처럼 쓰레기만 가득 채워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순간이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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