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9/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 (1)프롤로그

[창간29/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 (1)프롤로그
거센 바람 떠밀린 탐라사람 진솔한 눈으로 미지의 땅 기록
  • 입력 : 2018. 04.19(목)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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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조천읍 북촌 출신 무인
어머니 산소 이장위해 우도행
풍랑 만나 대만·중국까지 표류
조선에서 양자강 이남 첫 목격
"중국에 대한 뭇의심 깨트린 바
그 공적 일개 사신들보다 나아"


"제주(濟州)사람 전 충장장(忠壯將) 이방익(李邦翼)이 표류하여 복건(福建)에 이르렀다가 육로를 따라 소주(蘇州)와 양주(楊州)를 거쳐 연경(燕京)에 도착했다. 이방익이 조관(朝官)으로서 이역에 표류하면서 만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서 돌아왔다고 하여 비변사 제조에게 명하여 불러다 위유(慰諭)하게 하고 전라도 중군(中軍)으로 임명하였다."

정조 21년(1797)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이방익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200여년 전,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 이광빈은 나가사키 표착 경험=이방익은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지낸 이광빈(1734~1801)의 아들이다. 이광빈은 무과시험을 보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일본 나가사키로 표류한 일이 있다. 나가사키에 머물 때 한 의사가 이광빈을 집으로 데려가 환대하며 그곳에 남아 있어 주길 요청했다. 아리따운 여인을 소개시키면서 사위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이광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재물과 여자를 탐하고 사모하여 남의 나라에 귀화한다면 개, 돼지만도 못할 것"이라는 말로 거절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우도. 제주사람 이방익은 1796년 고향 사람들과 배를 타고 우도로 가서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는 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다 바람에 밀려 낯선 땅으로 표류했다.

다른 나라에 표류했다 귀환한 아버지처럼 이방익도 물설은 표착지에서 뜻밖의 경험을 했던 인물이다. 부자(父子)의 사연은 뱃길을 이용했던 제주사람들에게 표류가 다반사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배가 모진 바람에 밀려 혹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혹 남북으로 떠밀리며 무릇 16일만에 장차 일본에 가까워지려다 바람이 바뀌어 중국 쪽으로 향하였습니다. 갖고 있는 쌀이 떨어져 밥을 여러 날 먹지 못하였는데, 홀연 큰 고기가 뛰어올라 배 안으로 들어오자 8명이 함께 먹었고 마실 물이 이미 떨어졌는데 하늘에서 또 큰비가 내리자 손으로 받아 마시며 목마름을 풀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였던 연암 박지원이 쓴 이방익의 노정 중 한 대목이다. 연암이 이방익의 표류 기록을 챙긴 이유는 정조 때문이었다. 이방익의 문견(聞見)이 매우 진귀하다고 여긴 정조는 연암에게 그 일을 바로 적어놓으라고 명했다.

▶정조 때인 1796년 표류 약 9개월 뒤 생환=표류 기록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바깥 세상의 진실을 알려준다. 살아남은 자들은 구술을 하거나 직접 글을 써 표착지의 이국적 생활 풍습, 풍물 등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에 얽힌 정보를 생생히 전해왔다. 송환절차 등을 통해선 그 시기 외교적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연행사처럼 공식 통로를 거친 교류는 아니지만 표류 역시 서로 다른 문화가 조우하는 기회가 된다.

이방익은 양자강 이남의 '현재'를 조선에 알린 이였다. 연암은 "이방익은 바다에 표류해 민월을 지나왔건만 만 리 길이 전연 막히지 않았으니 중국이 안정되고 조용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뭇 의심을 통쾌하게 깨뜨린 바, 그 공적은 그렇고 그런 일개 사신보다 훨씬 낫다"고 평했다.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 강남을 이상향으로 삼아 시와 그림을 남겼지만 실제 눈으로 본 게 아니었다. 그들이 중국인들의 글과 그림으로 접했던 강남의 '얼굴'을 이방익은 직접 보고 왔다.

이방익 일행이 제주에서 배를 띄운 때는 1796년 9월이다. 제주 권무일 작가는 지난해 펴낸 '평설 이방익 표류기'에서 '일성록' 등을 토대로 그 사연을 세밀히 좇았다. 서울에 있던 이방익은 휴가를 받아 우도에 자리잡은 어머니 산소를 이장할 곳을 찾기 위해 제주에 온다. 고향 사람들과 작은 배를 빌려타고 북촌에서 뱃길로 50리 떨어진 우도로 건너가 이장 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풍랑을 만난다.

그 길로 이방익이 약 9개월간 바깥 세상을 떠돌게 될 줄 아무도 몰랐다. 배는 큰 바람을 못이기고 10월 초6일에 대만 서쪽에 있는 팽호(澎湖)섬에 닿는다. 이방익은 그곳에서 10여일을 머물다 대만으로 호송된 후 항구도시 하문, 복건, 절강, 강남, 산동 등을 지나 북경에 다다른 뒤 요동반도와 심양을 경유해 이듬해 윤6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2백여년 전 여정 문화교류 활동 촉발 기대"='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에서는 이방익의 지난 여정을 따라 나선다. 이방익이 태어난 북촌에서 그 출발을 알린 뒤 팽호도로 떠나 그곳에서부터 200여년 전 발자국을 되밟을 예정이다. 역사의 현장을 디디는 동안 과거 이방익의 행적을 확인하는 데 머물지 않고 표류 기록을 보충해 재구성하는 작업을 벌이겠다. 18세기말 제주사람의 눈에 비친 이국의 풍광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대만과 중국인들에게도 새로운 발견이 될 수 있다. 또다른 교류의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탐라거인(耽羅居人) 이방익'으로 시작되는 이방익의 기행 가사 '표해가' 등을 길잡이로 삼겠다. 무인이었던 이방익은 한문에 능하지 않았지만 한글을 혼용해 험한 바다 위를 가없이 흘러가던 절체절명의 순간, 낯선 땅의 문물과 풍속 등을 진솔하고 생동감있게 그려냈다.

권무일 작가는 "이방익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양자강 이남의 중국을 처음 목격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광폭적 행보는 대단한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며 "18세기 대만해협과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국제적 상황, 중국사회의 변화, 백성들의 생활상 등을 더듬고 제주와 중국 남방문화권의 교류와 활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교수)>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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