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 (3)'석호의 고향' 지베이섬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 (3)'석호의 고향' 지베이섬
돌그물 흩어진 그 섬이 떠도는 탐라사람 구했을까
  • 입력 : 2018. 07.08(일)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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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터를 타고 섬을 돌아보는 여행객들이 보인다.

표해록에 구체적 표착지 밝히지 않아
섬 북쪽 언덕·이동거리 등 고려할 때
본섬과 10여분 뱃길 최북단 섬 가능성


제주 바다에서 떠밀려 망망대해를 떠돈지 얼마였을까. 1796년 10월 6일(음력), 무려 16일만에 제주 사람 이방익 일행 앞에 섬 하나가 나타난다. 곧 그 섬에 발을 딛는 듯 했지만 돛대와 키를 잃은 그들은 다시 풍랑에 몸을 맡겨야 했다. 바람이 그들을 부려놓은 곳은 이름 모를 섬의 북쪽 언덕이었다. 이미 배는 산산조각이 난 뒤였다.

인기척 하나 없는 섬인가 했지만 멀리서 낯선 사람 하나가 그들을 엿본다. 잠시 뒤에 수백의 사람이 다가온다. 무인이었던 이방익은 정미년(1787)에 무겸선전관으로 임금을 호위할 때 봤던 중국 사람의 의복을 떠올리며 그들을 중국 사람이라고 여긴다.

▶배를 타고 5리쯤 간 뒤 마공시 향해=그들은 이방익 일행과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생면부지의 제주 사람들을 거뒀다. 더러는 붙들고 더러는 끌다시피 하며 섬에 표착한 제주 사람들을 인가로 데리고 간다. 이방익 일행이 그들과 3리쯤 걸어 갔더니 30여호의 큰 마을이 보였다. 다들 기와집이었고 조선처럼 닭과 개와 소와 말을 기르고 있었다. 그 섬은 어디일까.

현재 팽호섬 북부 지도 중 일부. 본섬에서 지베이까지 거리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방익의 표류 기록엔 지금의 대만에 속한 '팽호부' 지경이란 말은 나와있지만 표착지가 팽호 군도 어디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다만 "늦은 시간에 방 밖에 나와보니 큰 관아(공해)가 있고 문 위에 현판이 걸렸는데 '곤덕배천당(坤德配天堂)'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표착지 바깥 거리의 풍경을 묘사해놓았다. 처음 다다른 섬에서 6~7일 동안 머물며 원기를 회복한 뒤 배를 타고 5리쯤 가서 현재 팽호본섬의 지방정부 소재지인 마공시로 갔다는 대목을 통해 표착지를 역추적해볼 수 있다.

취재팀은 섬의 북쪽에 닿았다는 이방익의 기록, 본섬까지의 이동 거리 등을 따져 팽호 최북단 길패(吉貝, 지베이)섬으로 향했다. 팽호 북부로 가는 주요 통로로 한때 네덜란드가 관할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지명인 적감(赤嵌)은 이미 '섬 속의 섬'을 즐기려는 대만 현지 관광객들로 북적댔다.

▶태풍에 떠밀려온 통나무만 쓸쓸히=적감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10여분쯤 달렸더니 길패섬이 얼굴을 드러냈다. 2017년 8월 기준 1580여명이 살고 있는 길패는 팽호 북부 지방에서 가장 큰 섬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조개'란 뜻을 지닌 길패는 옛 고기잡이 방식을 보여주는 '돌그물'인 제주 원담과 유사한 석호(石호)가 100개 가량 남아있어 '석호의 고향'으로 불린다.

지베이섬 해안가. 팽호 군도 북쪽에 닿았다는 이방익 일행의 표착지일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여행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섬이지만 표착지를 찾아나설 교통편은 여의치 않았다. 외지인들에게 유일한 이동 수단인 스쿠터를 타려면 국제면허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행히 길패 주민 시에(謝)씨가 생업을 잠시 접은 채 낡은 승합차를 몰고 길잡이로 나서 줬다. 따거운 햇살 아래 어업을 하고 바다일이 드문 계절엔 관광객을 맞으며 지내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가 220여년 전 이방익의 발자취를 따라 대만의 작은 섬에 발디딘 제주사람들을 이끈 곳은 '석호의 고향' 안내판이 세워진 섬 북쪽 끝이었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 인적 드문 해안가에는 태풍에 떠밀려왔다는 커다란 통나무 등 해양 쓰레기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 중엔 한글로 쓰여진 탄산음료 병도 보였다. 시에씨는 할아버지를 통해 오래전 해안에 떠내려온 7~8구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섬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낭만을 넘어 고난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교수)·사진=진선희기자>



표류난민에 옷과 음식, 은전까지
제도 마련해 멀리서 온 사람 위로



지금, 여기 이방익을 말할 수 있는 건 그들을 품었던 낯선 땅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을 가리키고 배를 두드리며 배고픔과 갈증을 호소하자 표착지 주민들은 즉시 미음을 내왔다. 젖은 옷을 벗겨 말린 뒤 입혀주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팽호 본섬의 관청으로 불려간 뒤에는 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방익 일행에게 닭기름을 내오고 때때마다 각종 약재를 넣어 끓인 '향사육군자탕(香砂六君子湯)'을 지어 먹였다. 거리로 지나는 표류민을 구경하는 이들은 감귤과 유자 등 먹을 거리를 수레에 채워 가져왔다.

한달 넘게 팽호섬에 머무는 동안 이방익 일행은 새로 지은 옷도 제공받았다. 찬 계절에 필요한 두루마기, 목덜미까지 덮는 방한모, 버선 등 추위를 막아줄 의복이었다. 팽호를 떠날 무렵에는 은자 20냥과 동전 20냥을 받는다. 대만부로 출발하기 직전에는 호송관이 동전 4냥을 더 얹어주며 연희를 베풀었다. 이방익 일행에겐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내내 후한 대접이 이어진다.

이방익은 "남방풍속의 순후 인자함을 알 것 같았다"고 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당시 명대부터 이어온 전례를 이어 표류민 처리에 대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서풍(劉序楓)이 쓴 '청대 중국의 외국인 표류민의 구조와 송환에 대하여'(2010)에 따르면 청조 시기인 1710년대에는 지방의 총독과 순무(巡撫)가 해마다 연말이면 외국인 표류민의 구조 사례를 중앙에 보고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를 통해 중국 각지에서 이루어진 외국인 표류민의 처리 상태를 파악했다. 1729년에는 정부에서 중국에 표착한 외국 배의 처리 과정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중국 관부의 공금을 사용해 중국에 표착한 외국 선박을 구조하고 더 나아가 구조된 표류민들을 본국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도록 했다.

표류민 구조에 관한 제도는 차츰 정비되어 간다. 봉천, 산동, 강남, 절강, 복건, 광동 등 각 성에서는 난민을 구휼할 때 지급한 금전, 식량, 의류 등 물품과 수량을 명확하게 규정했다.

난민 구조에 들어간 재원의 경우에도 종래에는 지정은(地丁銀)과 봉공은(俸工銀)이라는 지방의 세금이나 관원의 급료 등이 사용되었지만 지방의 공비인 재공은(在公銀)의 사용이 인정된 뒤로는 난민 구조에 필요한 경비가 확보된다.

난민이 본국으로 송환된 뒤에는 지방관이 사용한 경비의 명세를 호부에 보고해야 했고 표류민의 성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선적 화물을 약탈하는 자에 대해선 엄중한 처벌을 가했다.

지방에서는 지방관이 책임을 지고 표류민에게 옷과 음식, 은전과 생활용품을 주었다. 각국의 표류민에 대해 "멀리서 온 사람을 위로한다"며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대우했다.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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