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 현장을 가다] (6)무역항구 천주로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 현장을 가다] (6)무역항구 천주로
수십층 아파트 배경 천년 세월 앞둔 돌다리 건너다
  • 입력 : 2018. 07.29(일)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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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 건물 등 강남의 번화함 목격
채양 주도로 지은 낙양교에 감탄
"장사꾼 오색 채선 쉴새없이 왕래"


몇 차례 보수를 거치며 얼굴이 조금 달라졌지만 옛 길의 정취는 그대로였다. 수백년 전부터 그랬듯 천주(泉州, 취안저우) 사람들은 오늘도 다리를 건너 이동 중이었다. 지난 9일 중국 복건성(福建省, 푸젠성) 천주시 낙양교(洛陽橋). 빠르게 변화해온 세월을 상징하듯 수십층 짜리 아파트를 배경으로 서있는 이 다리는 중국 고대의 4대 명교 중 하나인 유명 건축물이다. 220여년 전인 1797년 이곳에 제주사람 이방익이 있었다.

▶3만명 동원… 부력 이용 돌 운반="가는 길을 바라보니 돌다리가 50리는 되는데 다리 위에 무지개문이 몇 개인지 모르고 다리 가운데 무쇠은장을 박았으며 난간을 설치해놓았는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석교이다. 좌우에 저자를 벌려 놓았는데 넓기가 얼마인 줄 모르겠고 장사꾼들의 오색 채선이 다리 아래로 연속하여 왕래하는데 그 수를 알 수가 없다."

중국 고대의 4대 명교중 하나인 낙양교. 이방익은 이곳에서 강남의 번화함을 다시 한번 목격했다.

이방익이 일행이 하문부를 떠나 복건성으로 향하는 송환 노정에 포함된 지역이 당시 청나라 천주부였다. 팽호에서 대만, 하문으로 향하는 동안 도시의 화려함에 매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이방익은 천주부에 이르러서도 또 한번 감탄한다. 건물의 좌우 익랑(翼廊)과 뜰이 광활했고 대청에 깔아놓은 비단 자리와 붉은 색 방석이 참으로 휘황해 차마 앉지를 못했다.

이방익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인 중에서 중국 양자강 이남을 포함 가장 먼 지역을 돌아본 인물이다. 천주부 관청을 떠난 이방익 일행은 낙양교에서 강남의 번화함을 다시 목격하게 된다. 곡식이나 비단을 실은 수레가 넓은 길을 꽉 채운 걸 보며 "재화가 풍족하고 인물도 번성하구나" 여긴다. 천주부 옛터가 있던 지금의 천주부공안국에서 낙양교까지는 직선 거리로 11㎞였다.

낙양교를 찾았을 때 취재팀을 안내한 이는 '낙양교 전설'을 편저한 진덕삼(陳德杉) 선생이었다. 중학교 교사, 공무원을 거친 그는 낙양문화센터 총괄을 지냈고 2014년엔 천주시의 문화홍보 분야 유공자인 '아름다운 문화원'에 들었다.

채양 입상. 낙양교 건립을 주도한 인물로 그에 얽힌 전설이 숱하다.

그는 "이방익이 왔던 시대엔 복주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통과해야 했다"며 이방익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천주에 발디딘 제주 사람들에게 10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낙양교의 가치를 알렸다.

공사가 시작된 해는 북송 시기인 1053년 4월이었다. 천주시의 태수(太守)인 채양(蔡襄)이 주도해 6년여 만인 1059년 12월에 완공된다. 이 기간 공사에 투입된 인력은 3만명이 넘는다. 더러 낙양교에 깔린 돌이 긴 세월동안 교체되긴 했지만 다리 중간쯤엔 당시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에 수백 ㎏은 되어보이는 엄청난 무게의 돌을 운반할 때는 부력의 힘을 이용했다고 한다.

▶뱃속에 있던 채양이 위기의 배 구해=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바다 위에 세워진 낙양교는 몇 가지 특징을 지녔다. 진덕삼 선생은 다리 하단을 배 모양으로 설계해 파도 등 외부 충격을 완화시킨 점, 다리 밑 굴 양식이 낙양교의 하체를 더 튼튼하게 만들어준 점 등을 꼽았다.

낙양교는 그 가치만큼 전설도 숱하다. '낙양교 전설' 책자에도 13가지 이야기가 실렸다. 그중 하나에 채양의 어머니가 나온다.

어머니가 채양을 임신했을 때 작은 배를 타고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낙양강을 지나던 일이 있다. 낙양강은 평소 물살이 세고 선박 사고가 잦았다. 그 날도 강물이 파도치듯 했고 배에 올랐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 때 하늘에서 "채 대인(大人)이 배에 타고 있다. 그러니 짐승들은 무리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수면이 잠잠해졌다. 무사히 강을 건넌 이들은 채씨 성을 가진 사람을 수소문했고 채양 어머니의 시가(媤家)라는 걸 알고 큰 절을 올린다. 이 일을 계기로 채양의 어머니는 장차 뱃 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낙양강에 다리를 만들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다.

1810년경 천주 지도.

공사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는 과정에는 관세음 전설이 깃들었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모한 관세음을 차지하려 부자들이 배에 돈을 던졌고 어느 새 그 안에 재화가 그득차며 건립비가 모아졌다는 이야기다.

다리 입구엔 채양의 입상이 세워져 다리의 오랜 역사를 기리고 있다. 두 차례의 큰 보수 공사를 거치며 길이가 834m로 종전보다 200m 가량 짧아졌고 교각은 31개, 돌사자와 석정은 각각 2개로 줄었다. 대신 넓이는 5m에서 7m로 확장됐다. 오늘날 낙양교 아래론 그 옛적 상업 활동을 하는 무역선 대신 바다밭에서 생계를 일구는 고기잡이 배가 오간다. 뱃길을 떠나는 모든 이들의 무사안녕을 바라는 낙양교의 이칭인 만안교(萬安橋)의 의미처럼 천주 사람들은 오늘도 채양이 세운 다리를 밟으며 평안한 하루를 기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교수), 글·사진=진선희기자>



낯선 글자 새겨진 낙양교 돌탑
해상 실크로드의 시작점 알려


낙양교를 건너다보면 돌탑이 눈에 띈다. 건립 초기엔 9개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낙양강을 바라보고 서있는 돌탑을 두고 '낙양교 전설'의 편저자인 진덕삼 선생은 "외국과의 무역 흔적을 엿보게 한다"고 말했다. 돌탑에 새겨진 이름모를 글자들 때문이다. 그는 "돌탑에 남아있는 글귀가 정확히 무슨 뜻이고 어느 나라 글자인지 알 수 없지만 천주가 해상실크로드의 시작점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낙양교 돌탑. 해상실크로드의 시작점인 천주의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물 중 하나다.

천주는 대만해협의 서쪽에 위치했다. 복건성 3대 중심 도시중 하나로 2017년 8월 현재 인구는 858만명에 이른다. 중국 개혁개방 시범도시로 경제총생산량은 18년 연속 복건성 1위를 차지했다. 방직, 신발제조, 석유화학, 기계장비, 건축자재 등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이 101개 분포되어 있다.

빠른 속도로 경제적 발전을 거듭해온 천주지만 중국에서 처음으로 역사문화명성(歷史文化名城)으로 지정될 만큼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곳이다. 260년 삼국시대부터 형성된 도시로 해상 실크로드가 번성하기 시작한 송·원나라 시대(960~1368년)엔 동방의 제일 큰 항만으로 자동(刺桐)으로 불렸다. 천주를 고대 해상실크로드의 출발점이라고 하는데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동방견문록'에서 천주를 세계에서 제일 큰 무역항구로 평했다. 동서문화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천주를 두고 혹자는 '세계종교박물관'이라고 말한다.

지난 9일, 남송 때인 1196년 창건되었던 천주 천후궁(天后宮)을 찾았다. 지금의 천후궁은 청나라 초에 재건된 건축물로 해외에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제사를 올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해온 곳이다. 천후궁 앞에는 해상 무역 관련 문화유적인 자동 시대의 고(古)천주 덕제문(德濟門) 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방익은 천주에 갔을 때 상에 올라온 음식들이 화려하고 처음 보는 것이 부지기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취재팀이 천주시 방문 중에 맛본 요리들도 그랬다. 고려채 등 채소만을 이용해 한 편의 예술품처럼 차려놓은 음식에 눈까지 즐거워졌다. 천주시외사교무판공실 진회영(陳懷穎) 부조연원(副調硏員)은 "천주와 제주의 인연을 젊은 사람들도 알 수 있기를 바란다"며 "이방익을 통해 공동 연구 등 여러 분야에서 협력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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