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압록강·두만강을 가다] (9)용정과 격변의 조선족 사회

[백두산·압록강·두만강을 가다] (9)용정과 격변의 조선족 사회
19세기말부터 대거 이주… 조선족 인구이탈 등 위기감
  • 입력 : 2018. 10.22(월) 20:00
  • 이윤형 선임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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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암산 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시 전경. 해란강이 시가지 사이로 흐르고 있다.

용정은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
윤동주 등 민족시인 발자취 뚜렷

자치주 조선족 인구 갈수록 줄어
전통문화 전승 민족교육 위기감

용정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다. 100년 전 민족시인 윤동주가 나고 자라고 뛰놀던 곳이기도 하다. 탐사단은 지난 8월29일 용정과 연길 일대를 찾아 항일투쟁의 현장과 변화에 직면한 조선족 사회를 마주했다.

용정에서 20리,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명동촌은 윤동주의 고향마을이다. 현재 윤동주 생가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중점 문화재 보호단위로 지정됐다. 용정시 당국은 1994년 8월 생가를 복원 관광자원화에 나섰다. 생가는 방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구조로 된 기와집이다. 윤동주 일대기와 항일독립운동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관도 꾸며졌다. 생가 곳곳에는 다양한 조형물에 윤동주가 남긴 주옥같은 시편들이 새겨져 있다. 생가 입구에는 커다랗게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 새겨놓았다. 말끔히 단장한 생가를 보는 한편에선 씁쓸함이 베어난 것은 어쩔 수 없다. 치열하게 전개됐던 항일투쟁은 중국 내 소수민족의 역사로 편입되고 있다.

비암산 정상의 일송정.

윤동주 생가 앞은 송몽규가 태어난 곳이다. 정비된 윤동주 생가와는 달리 허름한 모습이다. 송몽규는 윤동주 시인과는 고종사촌간이다. 영화 '동주'에서 그를 기억할 수 있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쌍둥이 같은 이력도 이채롭다. 19세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할 정도로 문예적 기질도 남달랐다. 그의 문호가 '문해(文海)'다. 지난해엔 조선족 향토작가(리광인, 박용일 공저)가 집필한 '송몽규 평전'이 발간됐다. 조선족 사회에선 윤동주 못지않게 송몽규가 조명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정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 용정시에 의해 복원 정비됐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1927~1985)는 추모글 '선백(先伯)의 생애'(1955)에서 용정과 명동을 다음과 같이 추억한다. "1910년대 북간도의 명동, 그곳은 새로 이룬 흙냄새가 무럭무럭 나던 곳이요, 조국을 잃고 노기에 찬 지사들이 모이던 곳이요, 학교와 교회가 새로 이루어지고, 어른과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열과 의욕에 넘친 모든 기상을 용솟음치게 하던 곳이었습니다."(못다핀 청년시인, 2018)

이처럼 용정은 조선의 이주민들이 해란강 이북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고 현재 조선족자치주인 연길, 왕청, 훈춘, 화룡 등지로 가는 교통요지였다. 이주민들이 용정 땅에 들어선 것은 1884년쯤으로 전해진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 땅으로 이주한 때(1886년)는 청의 봉금령이 해제(1881년)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과 만주 일대를 그들 조상의 발원지로 여겨 성역화하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봉금령을 실시했다. 이 기간에도 세도정치와 대흉년으로 궁핍해진 조선인들이 이주해서 땅을 개간하며 살았다.

올해 9회째를 맞이한 조선족 농부절 축제.

'송몽규 평전'에는 1926년 12월 통계를 인용 용정에는 3312호에 1만5448명, 이 가운데 조선사람이 2343호에 1만1378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 '조선사람들의 집결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보니 용정은 민족교육의 요람이자 항일운동의 거점이 된다. 간도에서 우국지사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잇따라 학교를 세웠다. 이상설이 1906년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이자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열었다. 일제의 핍박과 자금난으로 폐교 후 1908년 명동서숙이 그 정신을 이어나갔다.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훗날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등이 명동소학교 동기생들이다.

탐사단이 찾은 또 하나의 항일투쟁의 무대는 일송정이다. 용정시 서쪽으로 약 3㎞ 떨어진 비암산 정상에 오르면 일송정이 있다.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정자로, 용정 8경의 하나다. 일송정 아래로는 해란강 물줄기가 용정 시내를 굽이굽이 휘돈다. 용정시와 평강벌, 세전이벌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평강벌 복판을 가로지른 해란강은 용정시에서 또다른 지류인 육도하와 만나 두만강으로 향한다. 이곳에 서면 드넓은 만주벌판, 거친 광야를 달리던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가곡 선구자의 노랫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곳이다.

한글 간판이 즐비한 연길 시내.

일송정은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상징이었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용정에서는 2만여명이 참가한 3·13반일대집회가 열렸다. 일제는 1930년대 이 나무를 고사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다시 심은 소나무로 지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생태공원으로 조성한 비암산 진입부에는 9회째를 맞은 조선족 농부절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10월초까지 풍수제, 꽃바다 감상, 비암산축제, 사과배따기축제, 배추김치문화관광축제 등이 한 달여 간 이어진다. 이 지역의 독특한 자연경관, 인문자원을 활용해 민족의 대단결, 융합, 발전을 위한 축제다.

일제에 저항하며 황무지를 일구고 뿌리내린 조선족 사회는 인구 감소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다.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족인구통계표를 보면 1911년 20만여 명에서 1930년 60만여 명, 해방되던 1945년에는 165만여 명으로 늘었다. 8·15 해방을 전후로 조선족은 민족대이동을 시작한다. 조선이 해방공간이 된 반면 중국은 치열한 국공내전에 들어간다. 조선의 동포들은 이러한 혼란기를 피해 고국으로 대거 되돌아갔다. 조선족인구통계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1949년 기준 중국 조선족인구는 110만 명으로 급격히 줄었다. 2000년 기준으로 192만여 명, 지금은 전체 중국 조선족 인구가 대략 2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중국 정부는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등 동북 3성에 정착한 한민족을 조선족이라 칭했다. 조선족 자치의 역사적 장을 연 것은 1952년 9월 3일이다. 당시 연길시 인민광장에는 3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것으로 알려진다. 인민정부의 정식명칭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였다. 이어 1955년 12월 자치구는 자치주가 되고, 조선민족은 조선족으로 변경됐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9월3일이 자치주성립기념일이다. 자치주에서는 고유한 언어와 풍습도 허용됐다. 연길과 용정시내의 즐비한 한글간판에서 이를 실감할 수 있다. 간판은 한글을 먼저 쓰고, 중국어를 쓰도록 하고 있다.

연변의 조선족 사회는 격변기를 맞고 있다. 조선족 사회의 최대 현안은 인구 이탈과 공동화 현상으로 요약된다. 연변TV는 최근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총인구가 정부 통계를 인용해 2017년 말 현재 75만7238명이라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인용보도에 따르면 자치주 총인구 210만1387명 중 조선족은 36.04%를 차지하고 있다.

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는 2010년 82만여 명, 2013년 79만9000여 명으로 감소 추세다. 출생률이 줄어드는데다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와 한국 등지로 많이 떠나면서 빚어지는 일이다. 이로 인해 농촌 노총각 결혼난, 인구 고령화, 자녀교육 문제 등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30~40년 뒤에는 자치주내 조선족 인구가 10만 정도에 머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조선족들이 많았던 두만강 연안 농촌은 서서히 한족이 점하고 있으며 조선족마을이 한족마을로 뒤바뀐 사례도 전해진다. 한족이 대거 유입되면서 자치주에서도 조선족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조선족 교육위기로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지켜온 우리말과 전통문화가 사라질지도 모른 위기에 놓인 것과 다름 아니다. 이러한 위기감은 결코 조선족 사회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가 연변땅에 계속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한 지혜를 모아나가야 한다.

특별취재팀

연변대, 민족종합대 위상 내년 70주년
제주대 등 주요대학과 MOU 체결

연변대는 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시 중심에 위치한 공립 종합대학이다. 중국 내 소수민족지역에서 가장 먼저 태동한 민족종합대학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보다 빨라 자부심이 높다. 우리 민족의 지식교육에 대한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동북조선인민대학에서 연길대학으로, 다시 연변대로 교명이 바뀌었다. 중국에서 한국어와 중국어가 함께 사용되는 유일한 대학이다.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다. 탐사단은 지난 8월 28일 연변대를 찾았다.

연변대의 태동은 조선족자치주 탄생에 공헌을 한 주덕해가 주도했다. 그가 연변대학을 창립하고 초대총장을 역임했다. 주은래 등 중화인민공화국 주역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주덕해는 훗날 문화대혁명의 희생양이 됐다.

연변대는 조선족 교육의 산실이다. 개교 당시 문학, 공학, 의학, 농학 계열의 4개 학부이던 것이 1996년 종합대학으로 개편됐다. 한국의 많은 대학과도 교육협력 협정을 체결, 활발히 교류중이다.

탐사단 일행을 맞은 임철호 부총장은 "제주대 등 한국내 100여개 대학과 MOU를 체결했으며, 졸업생들은 한국기업 등으로 많이 진출해 있다"고 밝혔다.

조선족인 임 부총장은 18년 전 탐사단이 백두산과 연변조선족자치주 방문 당시 공동학술세미나에 참석해 백두산의 지형지질에 대해 주제발표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는 대학의 리더로서 후학 양성과 국제교류에 발벗고 있다. 매년 4800여명의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으며 석박사 과정 포함 재학생이 1만8000여명에 이른다. 유학생도 15개국에서 온 200여명 규모라고 했다.

연변대도 조선족 인구 감소에 따른 고민이 많다. 과거 조선족을 입학생의 70%까지 받아들였으나 지난해에는 35%도 채울 수 없었다고 한다. 올해는 30%로 하향 조정했으나 27% 수준에 머물 정도로 조선족 학생 비율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임 부총장은 "전체적으로 자치주내 조선족 학생들이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 많다"면서도 "한국내 대학과의 교류를 더욱 활성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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