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0)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0)
  • 입력 : 2019. 05.02(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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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4-2. 어쩌다 그런 인연




상원리는 제주시와 가까운 곳에 있는 읍사무소 소재지 마을이다. 마을은 해안가에 조성되어 있으나 면적은 넓어서 한라산 자락까지 맞닿아 있다. 밭에서는 보리, 취나물, 양배추, 양파 등의 농작물이 자라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과수원을 만들어 밀감을 재배했다. 여인들은 제주의 여느 해안가 마을처럼 밭농사와 바다 농사를 겸업했다.

용찬의 어머니도 해녀였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물에 들며 홀로 두 아들을 공부시켰다.



그런 얘긴 장 씨 괸당집에나 강 고릅써.
우리 성님이 어떵허연 객지에서 죽고,
용찬이 아방이 누게 때문 비명에 간 줄 몰란 허는 소리우꽈?





시간은 망각이라는 약을 주지만 때로는 착각이라는 병도 준다.

선거가 한창일 무렵, 용찬은 할아버지 기일을 맞아 상원에 갔다.

삽화=고재만 화백

날이 저물자 친척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파제 시간을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었다. 늘 제사 때면 초등 교장 출신인 고모할아버지와 공무원 퇴직자인 작은할아버지가 언쟁했는데,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화제가 선거 이야기로 접어들었을 때, 고모할아버지가 이번 선거에서 장동철 후보를 뽑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작은할아버지가 대뜸 어깃장을 놓으며 격론이 벌어졌다.

"매형은 장동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암수가?"

"우리 동네에 그만헌 인재도 없다. 나와 종친이래서가 아니라 젊은 사람보단 경륜 많은 사람이 도의원이 되어사 한다는 말이주."

고모할아버지는 고집스럽게 장동철 씨를 감쌌다.

"허 참! 그런 얘긴 장 씨 괸당집에나 강 고릅써(말합서). 우리 성님이 어떵허연 객지에서 죽고, 용찬이 아방이 누게 때문 비명에 간 줄 몰란 허는 소리우꽈?"

용찬이 아주 어렸을 적 부친이 돌아갔다고만 들었을 뿐, 그 죽음에 대해선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아버지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도 않았다. 그런데 머리가 커지면서 가끔 아버지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입시원서를 쓰면서 부친의 부재 사연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할머니도 어머니도 시원한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 아파서 일찍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작은할아버지 입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용찬은 감기는 눈을 비비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얘긴 무사 꺼냄수가? 난 지금도 그 생각만 허민 섬찌그랑(섬찟)허연 몸이 떨렴수다. 설릅서(그만 둡서). 누게가 들엉 심어가카부댄(잡아갈까 봐) 겁 남수다."

긴 담뱃대를 물고 뻐끔거리며 연기를 뿜어내던 할머니가 끼어들었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오래 살아 신식 물이 들어서 담배를 피우신다고 했다.

"형수님, 이젠 고를(말할) 때도 되어수다. 그 사건 조사허연 신문에 연재도 햄수게. 그때 죽은 사름덜, 행방불명된 사름덜 신고도 받암덴 마씸."

"하이고 사름덜 다 죽어부러신디 조사허믄 무신거 헐 거라? 경헌댄(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름 살아올 거라?"

"이젠 시상이(세상이) 바뀌어수게. 문민정부라고 군인들 독재허던 시절 아니라 마씸. 대통령이 과거에 잘못된 일들 다 밝혀내 바로 잡으켄 허염수다."

"난 말다. 곧지도 말곡 듣지도 안 허켜. 아이고 선선허여."

할머니는 놋재떨이를 두둘기며 담뱃재를 털어내고는 일어서서 자리를 피했다.

"그 난리에 피해당하지 않은 집안 어디 이시(있나)? 저 웃드리(산간) 에선 마을 전체가 어서져 부러신디(없어져 버렸는데)."

할머니가 만류하며 나갔지만 두 노인의 논쟁은 다시 시작됐다.

"게무로사(그렇게 한다고 한들) 아멩(아무리) 세상이 바뀌었젠 해도 공산당 빨갱이들이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곤 못 허주."

"허어, 매형도 참. 그게 어디 4월 3일 하루 일어난 일을 고람수가? 예. 남로당 지령을 받은 이승진(김달삼)이 허고 이덕구가 앞장 섰댄 헙주. 경헌디 그루후제(그런데 그 이후에) 죄 어신 사름들이 무사 경 하영(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이) 죽어신디는 어떵 설명헐 거꽈?"

말문이 막히자 고모할아버지가 역정을 냈다.

"거 공무원이나 했다는 사람 입에서 무슨 소리고? 폭도들이 산에서 내려오란 불 부치고 대창으로 사람 찔런 안 죽였댄 말이가?"

"무장대가 죽인 사름이 하나면 양, 서북청년단, 군인, 경찰이 죽인 사람은 열 스물도 넘어 마씸. 동쪽 어느 마을에선 군인들이 사름덜 학교 운동장에 모이랜 해놓고 군인, 경찰 가족 아닌 사름들은 몬딱(모두) 총 쏘안 죽였잰 헌 말도 못 들읍디가?"

"그것도 먼저 군인을 건드려서 생긴 일이주. 이거 산사람들 펜만 드니, 느영 말 못 허켜."

작은할아버지는 논리적으로 고모할아버지를 제압하고 있었다. 고모할아버지는 깊숙이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가만히 경청 자세를 취했다. 작은할아버지는 신이 나서 용찬, 친족 삼촌들과 눈길을 번갈아 마주치며 입가에 삐져나온 침을 닦지도 않은 체 열을 올렸다.

"나도 그 난리에 하마터면 죽을 뻔 했져. 우린 그때 무장대 침범을 막기 위해 잣담을 쌓고 순번 정해 불침번을 섰주. 경헌디 어느 날은 불침번 서고 집에 돌아완 세수하고 이신디(있는데), 순경이 집집마다 돌아댕기멍, 젊은 사람들은 지서 마당으로 모이랜 허는 거라. 난 밤새낭 추위에 독독 털어나곡 졸리언 그냥 뭉썬 자 버렸주. 경헌디 나중에 들어보난, 지서에 모인 젊은 사름덜 몬딱 도락꾸(트럭)에 싣고 갔젠 허는 거라. 그때 돌아온 사름이 호나도 어섯져(없었어). 아휴, 그때 생각허민 몸이 오싹 허주."

"왜 젊은 사람만 싣고 갔어요?"

용찬이 관심을 보이며 끼어들었다.

"그땐 제주에 태어난 게 죄곡, 젊은 게 죄랐주. 젊으민 몬딱 빨갱이 취급해시니까."

"거 무사(왜) 선거 얘기허단 삼천포로 빠점시니?"

고모할아버지가 무료했는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끼어들었다.

"오늘 망인도 그 난리통에 일본으로 도망간 죽은 거 아니꽈? 이제야 골암수다마는 그게 다 장동철 때문이라 마씸."

"장동철이가 어떵 했단 말이고?"

"그 사름이 어떵 재산을 모아신디 알긴 햄수가?"

"무사 조상신디 물려 받은 거 아니라?"

"모르면 속심(조용)허영 이십서. 나가 호적계에 10년 근무해수다. 장동철 집안 이력을 훤히 꿰뚫고 이서 마씸. 그 사람 나이 세 살이나 줄인 건 알암수가? 정년 늦추젠 마씸. 원래 장동철 씬 우리 영일이 성님과 갑장 아니우꽈?"



장시간에 걸쳐 작은할아버지는 용찬의 집안과 장동철 씨와 얽힌 관계를 이야기했다. 그때야 용찬은 남의 얘기로만 알고 무심코 지나쳤던 4·3 사건이 자신의 집안을 처참하게 쓸고 갔다는 것을 알았다.

용찬은 작은할아버지가 들려준 자신의 가족사를 노트에 정리해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며 눈물을 훔쳤다. 그때부터 용찬은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고 정의와 진리를 밝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권정우 씨는 장동철을 찾아가 땅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권영일 씨가 북한을 지원하는 조총련에 가담했고,
아들이 일본을 오가며 간첩행위를 했다고 모함하여 권정우 씨를 구속해 버렸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장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시위장으로 변했다.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기마 경찰에게 어린애가 밟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군중들은 연일 경찰서가 있는 관덕정 마당에 모여 경찰을 규탄하며 시위를 했다.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의 사상자가 생기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진상규명과 발포자 처벌을 요구하며 학교, 각종 기관, 공무원까지 파업에 돌입했다. 경찰이 파업 참가자 검거에 나서자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은 한라산으로 피신했다. 미 군정 치하에서 치안을 책임졌던 조병옥은 이들을 폭도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한편, 소련 치하의 북한에서 부르주아 반동으로 몰려 빈손으로 쫓겨나 남한으로 온 사람들을 모집하여 서북청년단을 만들었다. 빨갱이라면 학을 떠는 그들을 제주로 보내 빨갱이 소탕에 참여하게 했고, 나중에는 군대까지 파견했다.

산사람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1948년 4월 3일을 기해 도내의 지서, 관공서를 공격했다. 결국, 제주에선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그때 장동철은 경찰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순사가 됐다.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에도 용케 살아남아 미 군정 아래에서도 경찰이 됐다. 그는 유독 땅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경찰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재산, 4·3 사건 당시 가족 전체가 몰살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그들 재산을 자기 이름으로 바꿔놓아 땅 부자가 됐다. 일본인이 재배하던 한라산 중턱의 초기(버섯) 밭을 몇 사람의 경찰책임자들과 나누어 가지기도 했다.



할아버지 권영일 씨는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 청년으로 해방이 되자 제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일본 유학을 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세계적 풍조였다고 했다. 지식인들은 36년간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된 나라가 못 사는 사람 없이 모두 행복한, 이상적인 국가 체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권영일 씨는 지역을 위해 봉사할 요량으로 교사를 자원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장동철 씨와는 어렸을 적부터 동네 친구였다. 그런데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중산간 지역의 땅이 장동철 씨 소유로 둔갑해 있었다. 그 땅의 반환을 요구하자 장동철 씨는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가, 사건이 터지자 권영일 씨를 아이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빨갱이로 몰았다.

결국, 권영일 씨는 일본으로 피신했고 거기서 할머니를 만나 아버지를 낳았다.

부친 권정우 씨는 일본에서 성장해서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제주 시내에 여행사를 차렸다. 일본 관광객을 모집하고 가이드 역할까지 하면서 성공했다. 직원이었던 어머니와 결혼해서 두 아들도 낳았다.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권정우 씨는 장동철을 찾아가 땅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권영일 씨가 북한을 지원하는 조총련에 가담했고, 아들이 일본을 오가며 간첩행위를 했다고 모함하여 권정우 씨를 구속해 버렸다.

그때 권영일 씨는 사상에 염증을 느끼고 조총련에서 일찌감치 탈퇴한 후였고 투병 중이었다. 아들의 투옥 사실을 전해 들은 권영일 씨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던 할아버지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할머니 품에 안기어 유골로 돌아왔다.

간첩 누명으로 십 년 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던 권정우 씨도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감방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때 용찬의 나이 세 살이었고, 동생 병찬이 태어난 해였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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