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8)천하와 국가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8)천하와 국가
도시국가 유사한 방국제 발명… 봉건·종법제 핵심
  • 입력 : 2019. 05.09(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국가는 國과 家가 합친 글자이다. 모두 갑골문에 나오니 이미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글자이다. 한대漢代에 이미 국가라는 말을 연결해서 사용했다. 하지만 nation의 역어로서 국가는 근대의 산물이다. 또한 국가를 의미하는 nation, country, state에는 '가'의 의미가 없다. 당연히 고대의 국가 개념과 현재의 국가 개념은 서로 다르다. 양자의 차이를 설명하려면 중국의 독특한 정치체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중톈易中天의 말처럼 그리스인들이 도시국가(Polis)를 만들었다면 중국인은 방국제邦國制를 발명했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방은 국을 뜻한다. '육서고六書攷'는 성곽 안에 있는 것을 국, 四境(사방 경계) 안에 있는 것은 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일종의 나라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도시국가와 유사하다. 하지만 도시국가가 서로 평등한 시민사회로 이뤄진 것과 달리 방국은 작위나 신분에 따라 차별되며 시민 위주의 민주제가 아닌 군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불평등한 방국제는 주나라 초에 만들어졌는데, 핵심은 봉건제도와 종법제도이다.

제후에 천하 일부 나줘주고
철마다 조공받아 체제 유지
주 왕조 결국 봉건제로 멸망


섬서 위수渭水 유역에 살던 희발姬發은 황하 북쪽 목야牧野에서 상商(도읍지 은殷)의 마지막 왕인 주紂의 군대와 맞붙었다. 싸움에서 승리한 희발은 호경鎬京을 새로운 도읍지로 건설하고 국력을 정비하여 주나라를 건국했다. 건국의 왕이니 무왕武王이 되고, 부친인 서백후西伯侯 희창姬昌은 문왕文王으로 추존되었다.

갑골문에 나오는 가(家). 집안에 돼지가 있는 모습을 본땄다.

희발은 자신의 승리를 은나라의 천명을 혁제革除했다는 뜻으로 혁명革命, 즉 천명을 바꾼 것이라 치장하고, 자신이 바로 천명을 이어받아 하늘을 아비로 땅을 어미로 삼는 천자天子로 왕이라고 칭했다. 희발의 군사들은 희姬씨네 친인척과 다른 성을 가진 부족들로 이루어졌다. 희발은 다른 부족들과 통혼을 통해 인척姻戚 관계를 맺었다. 전쟁에 참가한 부족연맹의 우두머리들은 이렇게 한 가족이 되었으며, 아랫사람들은 군신관계로 끈끈하게 맺어졌다. 이른바 천하일가天下一家가 된 셈이다. 승자가 되었으니 패자의 토지를 몰수하고 다시 분배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천자는 이미 하늘 아래 모든 땅의 주인이자 모든 사람들의 왕으로 천하가 그의 것이니, 별도의 나라가 필요할 까닭이 없다. 그래서 왕기王畿, 즉 도읍지 인근의 경기京畿만 직접 다스릴 뿐 나머지 땅은 여러 제후들에게 분배하고, 작위를 주었다. 이를 일러 봉건封建이라고 한다.

국(國)자의 변천.

봉건은 봉토건국封土建國의 준말이다. 천자가 제후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적절한 작위를 부여하며 각기 나라를 세우도록 하는 것이다. '예기禮記 · 왕제王制'에 따르면, 제후들의 작위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으로 나누어진다. 우리가 영국의 귀족들을 공작, 백작, 남작 등으로 칭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위수에서 낚시질하다 희창의 눈에 들어 태사太師라는 고위관직에 오르고 나중에 희발을 보좌하여 국사國師로서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강태공姜太公은 건국 후 제후齊侯(제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또한 무왕이 건국 2년 만에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희창의 넷째 아들이자 무왕 희발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들에게 분봉된 땅이 바로 지금의 산동성 노魯이며, 도읍지는 곡부曲阜이다. 이들 두 사람은 제후 중에서도 최상급인 공公이다. 봉토를 받은 제후는 다시 경, 대부에게 분봉했다. 이렇게 해서 천하의 모든 토지는 천자의 것이되 제후와 경, 대부가 책임지고 다스리는 정치체제가 완비되었다. 주나라 초기에 분봉된 제후국은 71개국으로 알려져 있는데, 태반이 같은 성姓의 제후국이고 일부는 이성異姓의 제후국이다.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 71개
수신제가치국 다음 '평천하'
천하 소유 천자의 일 여겨


주 무왕.

봉건제의 신분 구조는 천자 아래 귀족으로 제후, 경卿, 대부大夫, 사士, 그리고 여민黎民, 서민庶民으로 칭하는 일반 백성百姓(처음에는 성을 가진 귀족을 지칭했다)은 국인國人, 야인野人, 노예로 구분했다. 천하를 소유하고 있는 천자를 제외하고, 제후의 나라는 국國이라고 불렀고, 경대부의 식읍食邑은 가家라고 불렀다. 사는 귀족이기는 하되 별도의 식읍이 없으며 오직 자신의 재능만으로 살아야만 했다. 이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제가'와 '치국'이 어떤 의미인지 보다 분명해진다. '제가'는 경, 대부의 식읍을 다스리는 일이고, '치국'은 제후가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당연히 '평천하'는 천자의 일이다.

천하는 천자의 왕기를 제외하고 여러 제후국, 대부의 가읍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여전히 천자의 소유이다. 천자로서 왕은 모든 것의 소유자일뿐더러 천하의 조종祖宗이다. 천자는 적장자嫡長子(정실의 장남)가 승계하고 나머지 아들들은 제후로 강등되어 봉국을 받는다.

제후 역시 적장자에게 승계되고 나머지 아들들은 경, 대부로 강등되어 가읍을 받는다. 천자는 천하일가의 큰집으로 대종大宗이 되고 제후는 왕에게는 소종小宗이 되지만 경, 대부에게는 대종이 된다. 이렇게 해서 천하는 한 집안처럼 상하가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는다. 이를 일러 종법제라고 한다. 이는 씨족사회 가부장제의 유물로서 군주제와 결합하면서 주 왕조는 물론이고 이후 청대까지 봉건전제체제를 유지하는 정치체제의 근간이 되었다. 중국인들이 유별나게 적장자 계승을 중시하여 남성 위주의 상하질서를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주공 단(旦). 주공은 왕이 광대한 천하를 직접 다스릴 수 없으니 봉건제를 통해 공고한 체계를 마련할 수 있다고 봤다.

주 왕조는 건국 이후 봉건제와 종법제를 중심으로 국가 체계를 완비하였다.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무왕의 동생인 주공이다. 그는 왕이 광대한 천하를 직접 다스릴 수 없으니 봉건제를 통해 왕을 천하의 중심에 두고 사방의 제후들이 병풍처럼 에워싸는 공고한 체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은 이를 "친척일가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국가를 세우도록 하여 제후국을 주나라의 병풍으로 삼는다"고 했다. 천자는 제후들에게 천하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대신 철마다 그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책봉과 조공의 역사는 이렇듯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녔다. 더군다나 모든 이들이 천자인 왕을 큰집으로 받드는 사해일가四海一家가 되지 않았던가! 가족에 효가 있으니 나라에 충이 있는 것은 같은 이치가 아닐 수 없다. 충효는 이렇게 아주 오래전부터 같이 쓰였다. 이른바 가국동구家國同構(가족과 나라가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니 당연하다.

낚시하는 강태공의 모습을 담은 그림. 강태공은 훗날 제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공자는 주나라의 이러한 정치체제와 이를 창안한 주공에 감복했다. "나도 많이 늙었구나. 내가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 이토록 오래되었으니 말이다(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그와 그의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봉건제도와 종법제의 수호자였다. 역대 통치자들은 유가의 학문을 통해 자신들의 통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주 왕조는 바로 이런 봉건제로 인해 결국 멸망하고 만다. 천하일가라고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서로 남남이 되기 마련이다. 서주 시대는 그래도 천자가 부르면 여러 제후들이 달려와 조공하였으나 동주시대, 이른바 춘추전국 시대의 실권자는 오패와 칠웅이었다. 천자는 그저 명목만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천하의 지배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진 시황제는 봉건제 대신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를 택했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216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