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0)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0)
  • 입력 : 2019. 07.11(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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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8-1. 기회는 날개가 달렸다.


온 나라가 한일월드컵의 열풍 속에 잠겼을 때,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이 시행됐다. 권용찬이 서울에 있는 신문사에 견습 사원으로 입사하여 기자 일을 배울 때였다. 제주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데스크에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국제자유도시에 대한 기사를 써보도록 과제를 받았다. 용찬은 긍정적인 접근보다는 비판적인 안목에서 기사를 썼다.

용찬은 모든 제도가 인간을 기본으로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제도가 인간성을 파괴하고 괴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사가 나간 뒤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나서야 터득했다.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은 ‘사람과 상품, 자본 이동이 자유롭고 기업 활동의 편의를 최대한 보장해 동북아 거점 도시로 육성하기 위해 마련된 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 기본계획을 뒷받침할 근거법’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국내외 투자 유치를 위한 인센티브 부여 등 환경을 조성하고, ‘7대 선도프로젝트’를 추진해서 제주를 싱가포르처럼 국제적인 도시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제주도를 '축소된 신자유주의의 실험 무대'로 만들겠다는 발상이 담겨 있는 셈인데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어두운 그늘이 우려된다.

국제자유도시 추진으로 외국자본이 물밀 듯 밀려오면 투자가 촉진되고 경제가 활기를 띠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제주의 생태적 환경, 고유의 문화 정체성, 전통적 가치관은 크게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삽화=고재만 화백

제주도는 예부터 내륙과는 사뭇 다른 독자적 문화를 계승하여 왔다. 유배문화의 영향으로 중세 시대의 어휘 체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제주어가 대표적이다.

제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거인여성창조주 설문대할망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1만 8천 신의 고향이다. 또한 천 년의 해상왕국 탐라국의 옛터이며, 백 년간 원(몽골)의 직접 통치를 받으면서 육지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 체계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고유한 탐라 문화의 보존·계승을 위해서라도, 거대한 외부의 문화와 상충하는 문제에 대한 체계적 대책과 대안 없이 특별법을 추진하는 것은 급격한 저급 문화로의 혼재화와 문화 식민화를 촉진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또 다른 회의론의 근거는 특별법이 1차 산업의 붕괴를 불러올 것이라는 비판이다. 실제로 특별법 발효로 개발이 가속화되면 제주도내 농어업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 측은 해양수산과 수자원 조성에 총 1조 원이 넘는 재정을 투입하겠다고 했지만, 국제자유도시 건설을 반대해온 시민단체 측의 입장은 단호하다. ‘뿌리가 뽑혔는데 물을 준다고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실제로 골프장 건설 등을 포함한 관광단지 조성이 자유화되면, 농업 등 1차 산업의 바탕인 '땅'이 개발의 여파에 밀려 점차로 축소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이는 자연스레 환경문제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연간 1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위락관광의 중심지가 되면 그에 대비한 환경적 대안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5천여억 원의 재정으로는 제대로 된 환경정화시설 건립이나 환경관리 비용 마련도 빠듯한 상황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작지만 강한 제주’를 외쳐왔던 제주도내 개발론자들은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면에서 볼 때 이번 계획이 반대여론 등에 밀려 후퇴했다고 오히려 불평을 늘어놓는 상황이다.



용찬은 모든 제도가 인간을 기본으로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제도가 인간성을 파괴하고 괴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나서야 깨우쳤다.

제주경마공원의 경우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느냐는 어느 독자의 지적은 경험칙 면에서 설득력이 있었다.

제주경마공원은 정부에서 앞장서서 제주 관광의 명소이자 자연 쉼터라는 미명 아래 건립했지만, 이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순진한 제주 사람들을 한탕주의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온 가족이 구슬땀 흘려 농사지어 결실을 보면, 하루아침에 일 년 수확을 삼키는 게 경마였다. 땀의 진실을 믿던 순진한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주말이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는 곳이 경마장이 되었다. 아이들과 잘 놀아주며 그렇게 착하고 일만 알던 이웃집 가장이 경마에 미쳐서 폐인이 되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경마장은 인간의 성정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주말이 가까워지면 까닭 없이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며 신경질적 증세를 보이는 최면증후군 좀비들도 생겨났다. 가정이 파탄 나고 빚더미에 앉게 된 사람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왕 사장도 한동안은 경마에 빠졌었다. 노름 좋아하는 것도 중국인 유전자라 했다. 친구의 권유로 함께 경마장에 갔다가 아편을 맛본 꼴이 됐다. 주말이면 가족끼리 외식하러 오거나 배달 주문이 많았지만, 경마에 맛을 들인 왕 사장은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은 휴일 팻말을 달아놓고는 경마장엘 갔다.

처음엔 부인 몰래 배달원이 수금해 온 돈 중에서 일부를 감춰 놓았으나 그것으론 성에 차지 않아서 나중에는 부인에게 용돈을 강요해서 경마장으로 달려갔다. 가산 탕진하고 신세 망친 사람들이 한둘 아니라고 부인은 걱정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어리석은 놈 아니라고 도리어 부인을 설득했다.

일요일 문을 닫는 이유를 묻는 용찬을 붙들고 왕 사장이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 봐. 이 나이에 주말이면 뭐 하겠어? 먹고살기 바쁜데 친구가 있나? 놀아 줄 아이들이 있나? 그렇다고 이 조그만 섬 바닥에 어디 구경할 곳이 남았나? 그저 아침부터 열심히 장사 준비하고 장사 끝내면 맥주 몇 캔 마시고 잠드는 게 반복된 일상인데. 낙이 없어. 그래서 난 주말만 기다려. 경마, 그거 재미있거든.“

”따기도 하세요?“

”그건 나완 상관없는 문제지. 맞추는 재미, 그런 묘미 때문에 가는 거야. 뭔가 될 것 같은 그런 직감이 맞아떨어졌을 때 느끼는 쾌감 말이야. 난 그걸 즐기기 위해서 경마장엘 가지만 돈을 따려는 목적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 따는 사람은 백 명 중 하나나 될까?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결국 다 잃게 돼 있어. 그걸 터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

그의 경마장 출입은 화재 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화재 이후 의기소침한 왕 사장을 보다 못한 부인이 용돈을 쥐어주며 다녀오라고 권유했지만, 화재 충격이 워낙 커서 그는 경마장에 흥미를 잃고 발을 끊었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키스해’, ‘키스해’가 연창 됐다.
용찬이 머쓱한 표정으로 해연의 팔을 잡자 해연이 눈을 감았다.
용찬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의 입술을 포갰다




‘헤이 필승 코리아’라는 노래는 온 국민에게 붉은 티셔츠를 입히고 집단 최면에 빠지게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용찬과 해연을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줬다.

해연은 용찬의 신문사 취직을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용찬은 초짜 기자 신분이라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느라 바빴고, 해연도 학교 일과 연주회 연습 관계로 서로 만날 시간을 자주 갖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들은 붉은 악마 복장을 하고 광화문에서 만나 함께 응원했다. 한국이 승전할 때마다 에프터 타임이 길어졌다. 만남이 잦아질수록 사랑도 깊어졌다. 용찬은 프러포즈의 기회를 한국이 16강에 오르는 날로 정하고 미리 반지도 마련해 두었다.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고 1-0으로 포르투갈을 무너뜨린 날, 용찬은 그녀를 분위기 있는 음악 카페로 데리고 갔다. 달달한 음악에 사람들의 들뜬 마음이 잦아들 때, 용찬은 간단하게 사연을 쓴 쪽지에 담배 한 개피를 말아 DJ 박스로 집어넣었다. 쪽지를 읽은 DJ는 플레이되던 음악이 끝나자 바로 멘트를 시작했다.

”여러분 잠시만 정숙해 주십시오. 아주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DJ의 멘트에 술렁이던 장내가 차츰 조용해졌다.

”오늘 한국의 젊은이들이 축구 강국들을 물리치고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오른 기쁜 날, 여러분의 축복 속에 아름다운 인연의 결실을 맺고자 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그 순간까지도 해연은 아무것도 모르고 캔 맥주로 목을 축이는 중이었다..

”장해연 씨! 어디 계세요? 잠시 일어나시겠습니까?“

무심결에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해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용찬을 보았다.

용찬은 상기된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띠며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장해연 씨?”

해연은 용찬에게 곱게 눈을 흘기고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일어섰다.

”예. 저기 계시군요. 자 이제 직접 이야기하세요. 이런 중대 사업을 쪼잔하고 비겁하게 DJ를 통해서 말하면 평생 쪼다 돼요.“

주변에서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렸다. 용찬은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준비해 온 반지를 내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평생 내 곁에 있어 줄래? 잘 해 줄게.“

해연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답해! 대답해! 대답해!“

누군가 선창하자 장내의 모든 사람이 한목소리가 되어 응원했다.

그러자 사회자가 제지했다.

”예, 그만 하세요. 해연 씨가 겁을 먹었나 봅니다. 자 선택권은 장해연 씨에게 있습니다. 그냥 핸드백을 들고 출입구로 나가시던지, 아니면 내미는 반지를 받으세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연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반지를 받아 들었다. 관중들의 박수와 함께 환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재치 있는 DJ가 마지막 멘트를 날렸다.

”예, 권용찬 씨 로또 맞으셨군요. 붉은 악마 복장에 싸구려 반지 하나로 프러포즈에 성공했습니다. 잘 해 준다는 의미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최선을 다해 밤일도 잘해 주세요! 부탁해요!“

DJ의 멘트가 끝나면서 팡파르가 울려 나왔다. 관중들은 박수와 함께 누군가의 선창으로, ‘키스해’, ‘키스해’가 연창 됐다.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자 용찬은 머릿속이 텅 비어왔다. 용찬이 머쓱한 표정으로 팔을 잡자 해연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용찬도 눈을 감고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우렁찬 환호와 박수가 나왔으나 그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해연의 눈에선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준 작가 :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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