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4)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4)
  • 입력 : 2019. 08.08(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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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9-3. 바람에 스치는 별




"할머니가 저렇게 완강하신 거 이해해라.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어머니, 이모가 한림 이모 말고 또 있었어요?"

"그리 앉아라."

어머니는 먼저 바깥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용찬을 안으로 앉게 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닦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얘기를 풀어놓았다.

"사실 난 언니의 덕으로 성안(제주시)에서 고등학교 다녔다. 그때 다섯 살 위 큰 언니가 장 읍장네 사무실에 다니고 있었지. 언니 소개로 학비 대주고 용돈도 준다기에 난 그 집에 식모를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깡패 짓하던 아들 장석규가 강제로 언니를 여관으로 끌고 가 욕보이고 말았어. 그 치욕을 참지 못한 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헌데 그 소문이 번지면 야심이 많은 장 읍장은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어머니한테 은밀히 제안을 했어. 충분히 보상해 줄 테니 군대 가서 죽은 자기 아들과 영혼 결혼시키자고 말야. 언니를 죽게 만든 집안과 결혼이라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외할머니는 한 푼이 아쉬운 마당이라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어려운 집안 형편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이후에 네 아버지를 만나 그 집안과의 또 다른 내력을 알게 되었지만 다 과거 일로 치부해 버렸다. 그 집에 자취방 잡은 것도, 해연을 만난다고 했을 때도 선대의 일이 무슨 소용이랴 싶어 말을 안 했다. 넌 대처에서 들은 것도 많을 테고 공부도 많이 했으니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

어머니는 말을 마치고 손수건으로 코를 소리나게 풀며 밖으로 나갔다.

삽화=고재만 화백.



"너 감히 어디서 우리 해연이 넘봐? 빨갱이 자식 주제에 말이야."
용찬은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감전된 상황이라 그의 말에는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했으나, 이어지는 말에는 소름이 돋으면서
머리카락이 서는 것을 느꼈다.




용찬은 장석규라는 인간의 정체에 또 한 번 실망했다. 인간의 악마적 본성은 언젠가 스스로를 파괴하게 될 운명이라는 걸 믿었다. 그런 자에게서 해연이 태어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다니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일까? 혼자 벽에 기대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생각했지만, 머리만 아프고 명쾌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해연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그녀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해연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으나 받지 않았다. 바닷가로 갔겠거니 짐작하고 용찬은 바다로 달렸다. 거무튀튀하고 울퉁불퉁한 갯가와 흰 모래가 있는 해변까지 다 뒤졌으나 해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용찬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차를 시내로 몰아 해연의 집을 찾았다.



용찬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해연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냐? 퉁퉁 부은 얼굴로 들어와서는 말도 않고 짐을 들고 나가더구나."

"죄송합니다. 그럴만한 일이 있었어요. 차차 말씀 드릴게요. 안녕히 계세요."

용찬이 허리 굽혀 인사하고 돌아서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야. 너 잠깐 나 좀 봐."

누군가 용찬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장석규였다.

"아이 여보, 나중에 천천히 해요."

부인이 만류했으나 그는 이미 거나하게 약주를 마신데다가 부아가 치밀어 올랐는지 얼굴이 흙빛이었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 너 이리 좀 앉아 봐."

갑자기 '너'하고 하대하는 소리에 주눅이 들어 용찬은 거실로 들어가 앉았다. 해연이 어머니는 벌어질 상황을 미리 짐작했는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 감히 어디서 우리 해연이 넘봐? 빨갱이 자식 주제에 말이야."

용찬은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감전된 상황이라 그의 말에는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했으나, 이어지는 말에는 소름이 돋으면서 머리카락이 서는 것을 느꼈다.

"너네 아방 어떵 죽었는지 알지?"

"예. 압니다. 그래서요?"

"임마, 뭐가 그래서야? 주제를 알면 다신 우리 해연이 곁에 얼씬거리지 말아. 너 같은 새낀 귀신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가 있어 임마. 알아?"

순간 대꾸를 하면 해연과 끝난다는 생각에 용찬은 목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꾹 내려 눌렀다. '난 네가 악마의 발톱을 감추고 있다는 걸 다 알아.' 말하고 웃어줄까 하다가, 지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서 고개만 까딱하고 일어섰다. 예상치도 못한 용찬의 태도에 당황했는지 '저, 저 새끼가.'하는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대문을 닫고 나오는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쨌든 해연이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용찬은 공항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신제주의 한 오피스텔 5층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윤이 나는 남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벗겨진 이마를 쓱 하고 쓰다듬더니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나왔다. 시간이 늦은 듯 그는 뛰다시피 복도를 걸어서 '제주경제문화연구소'라는 현판이 붙은 사무실 문을 열었다.

중국을 다녀온 전형진이 제주경제문화연구소 핵심 멤버들을 긴급 소집했다.

사무실에는 전형진, 홍민태, 여창희 교수, 장석규, 그리고 금방 들어온 도의회 자연환경위원회 위원장인 서길준 등 다섯 사람이 모였다.

"조금 늦었습니다. 상임위 회의가 길어져서요."

"어서 와요. 서 위원장. 이제 금방 시작하려던 참이야."

넓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던 전형진이 허리를 세우며 서길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서길준이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후 의자에 앉자 전 지사가 회의를 주재했다.

"자 시작합시다. 오늘 이렇게 모이라 한 것은 삼미동 프로젝트 추진에 관한 건 때문이요. 중국의 재벌 그룹을 상대하는 사안이라 신중하게 검토할 내용도 있고. 우선 홍 실장. 랴오닝 그룹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해요."

전 지사 이야기가 떨어지자마자 홍민태는 준비해온 유인물을 봉투에서 꺼내어 일행들에게 분배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랴오닝은 중국의 요녕성에 본사를 둔 보험과 건강식품 판매를 주력 업종으로 하고 관광, 해외부동산 등 13개 계열회사를 둔 중견그룹입니다. 본사에만 1만여 명, 계열사까지 합치면 30만 명에 달하는 사원을 두고 있으며 연간 약 1000억 위안의 매출 실적을 올리고 있는 신흥 기업입니다."

홍민태가 랴오닝 그룹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마치자 전형진이 질문했다.

"랴오닝과 대룡과의 관계는 믿을 만한가?"

"대룡반점 왕강룡 사장은 랴오닝의 왕치영 고문과 숙질간이 맞습니다. 대룡그룹은 랴오닝과 합작 기업으로 80% 이상이 랴오닝 자본입니다. 대룡은 카지노호텔을 비롯하여 제주에만 호텔 7개에 4백여 객실을 확보하고 있고, 카지노호텔의 카지노 운영권과 1천여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식당 건물 3채, 전세버스회사, 중국인 대상의 면세점, 관광여행사, 관광유람선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추임새라도 놓듯 서길준이 한마디 했다.

"흥. 다 쓸어가는구만."

전형진이 서길준을 보며 못마땅한 듯 미간에 바늘을 세웠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 덕분에 벌어들이는 지방 세수와 일자리가 얼만데. 헌데 대룡이 언제 이렇게 컸어?"

그러자 장석규가 거들었다.

"그게 다 중국 자본의 힘 아닙니까. 그걸 끌어들인 사람이 대룡반점 큰아들 왕금산입니다. 제 며느리 오라비지요. 허허허."

그 말에는 구겨졌던 전형진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왕금산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건 중국에 가서 알았소."

장석규는 자신이 중국자본을 유치한 것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말했다.

"앞으로 왕금산을 잘 활용하면 중국인들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창출할 수 있을 겁니다."



"내 생각엔 이 사업을 위해 왕금산에게 완장을 채워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소?" "제주홍보대사 같은 것 말이요."




"랴오닝의 제안서는 어떻소? 타당성 있어 보입니까?"

전형진의 질문에 여창희 교수가 책자로 만든 검토 보고서를 내밀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면밀하게 검토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국 자본을 끌어들여 지역 경제 활성화를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안입니다. 삼미동 지역에 위락 시설과 콘도를 지어 중국인들에 분양하면 휴양도시라는 이미지와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출 수 있고, 또 각종 세제를 통한 경제 수익과 지역 주민과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도 가능한 프로젝트입니다. 단지, 현지 주민들 설득 문제와 위락시설 중에 카지노 유치에 대한 여론을 어떻게 무마시킬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주민들 보상 충분히 해주고, 카지노 문제는 법적으로 하자 없이 처리하면 되지 않겠소?"

전형진의 발언에 듣고 있던 서길준 의원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헌데 아무리 자본이 든든하다지만 삼미동 프로젝트를 한 업체에 몰아주는 것은 위험부담이 많고, 동종 업체들 사이에 불만이 클 겁니다. 구획을 나누고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공개입찰을 통해 사업자를 선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서길준의 의견에 전형진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면 랴오닝에 부가 없지 않은가? 내 솔직히 중국에 가서 리 회장 부자를 만났소. 그들은 대단한 관심을 보였소. 그들의 참여가 아니면 분양문제도 그렇고 이 프로젝트 성공하기 어려워요. 엉뚱한 곳이 낙찰 되어서도 안 되고."

그러자 홍민태가 끼어들었다.

"그건 입찰 조건에서 디테일을 강화시키면 됩니다. 랴오닝에게 맡기면 그들이 입찰 안을 만들어 오지 않겠습니까? 허수아비 경쟁자도 내세울 겁니다."

"좋아 그건 홍 실장이 알아서 하게. 난 박 지사에게 미리 언질해 놓겠네."

"도시 디자인 일을 잘 할 수 있는 적임자가 있습니다."

홍민태가 느닷없이 도시 디자인 문제를 꺼내 들며 대놓고 인사 청탁을 했다.

"제 조카인데 도시공학을 전공한 박사이고 서울시에서 경력을 쌓은 전문가입니다."

"그런 인재가 있다면 특채를 해서라도 모셔야지. 나오룡 교수에게 이력서 보내요. 내가 얘기할 테니."

"고맙습니다."

전형진이 다시 제안을 했다.

"내 생각엔 이 사업을 위해 왕금산에게 완장을 채워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소?"

서길준이 민감하게 빈응했다.

"완장이라면?"

"제주홍보대사 같은 것 말이요."

그러자 장석규가 반색하며 나섰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그 친구 그런 거 주면 참새 방앗간 드나들듯 중국을 오가며 열심히 제주를 홍보할 겁니다."

전형진이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려나간다고 생각했는지 기름기 낀 얼굴에 입 꼬리가 귀에 걸린 듯 했다.

"사실 랴오닝에서 요청한 일이기도 하오. 우리는 제주를 알릴 수 있어서 좋고, 랴오닝은 성공한 화교를 내세워 사업 홍보되어 좋은 거 아니요? 서 위원장 어떻소? 도의회에서 추천 좀 할 수 있나요?"

전 지사가 일을 밀어붙이는 이유를 짐작하며 서길준이 화답했다.

"젊은 친구가 지금까지 관광계에서 낸 업적이면 충분합니다. 그거 어려운 일 아닙니다."

"좋아요. 내 금명 간 지사 만나서 담판 짓겠소. 여하튼 일이 성사되기 전엔 모두 입조심들 해요."

전형진의 말에 일행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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