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장자 은거 주장보다는
이름 날릴 현달 부정했을 뿐
유가의 은거 기다림과 준비
도가는 달념이자 달관 의미
도연명 '귀거래사'엔 시은
입신양명-소오강호 순차적
세상에 태어나 누군들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일이란 것이 어찌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하여 현달顯達하여 자신과 집안의 이름을 날리다가 어느 날 돌연 시쳇말로 '훅'가는 일도 있을 것이고, 좌천하여 실의에 빠졌다가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감탄할 때도 있을 것이다. 능력과 재주는 있으되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지사不遇之士가 있는가하면 실력도 없으면서 어쩌다 높은 자리에 오른 행우지사幸偶之士도 있으렷다.
굴원의 '어부사' 그림.
"궁즉독선기신, 달즉겸선천하(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맹자·진심'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자신을 수양하고, 뜻을 얻어 영달하면 천하 사람들과 더불어 선한 일을 실천하라." 맹자의 명언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구절이다. 뜻을 얻지 못하는 까닭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직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우한 경우이다. 인용문의 '궁'은 양자에 공히 적용된다. 그의 발언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가 태어나기 180년 전 세상에 나온 공자가 이미 "천하에 도가 있으면 사회로 나와 일하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태백泰伯')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사상과 이상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고단한 유세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맹자 강학도(講學圖).
공자는 기원전 496년 여러 제자들과 함께 천하 유력遊歷의 길에 올라 제齊, 송宋, 위衛, 진陳, 채蔡, 조曹, 정鄭 등 각국의 제후들을 만났으나 자신의 도덕정치를 수용할 만한 인물은 만나지 못했다. 결국 13년 동안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다가 귀국하고 만다. '논어' '향당'편에 보면 공자가 "쉰밥이나 상한 생선, 썩은 고기는 드시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필자는 이것이 단순히 향당鄕黨(향은 2500호, 당은 500호)에서 행한 모습이라기보다 주유천하하던 시절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사기·공자세가'나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공자가 정나라로 갔을 때 제자들과 엇갈려 길을 잃고 헤맬 때의 모습을 '집 잃은 개(喪家之狗)'와 같았다고 표현했으니 능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저우룬파(周潤發) 주연의 영화 '공자'의 한 장면 '상가지구'.
맹자의 유세도 유명하다. '맹자'의 첫 편 '양혜왕'은 맹자가 위魏나라 혜왕에게 유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노인께서 천리가 멀다하지 않고 오셨는데(수不遠千里而來), 역시 우리나라에 이익(利)이 있겠지요?" 맹자가 답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하십니까? 역시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당시 위나라는 손빈孫빈이 지휘하는 제나라와 싸워 크게 패배한 후 공손앙公孫앙(상앙商앙)을 앞세운 진나라의 진격으로 도읍지마저 대량大梁으로 옮긴 뒤였다. 풍전등화의 정세에 유세객이 와서 하는 말이 어질고 의로워야 한다니? 결국 맹자는 헛발만 디딘 셈이다. 현달이 불가능하니 은거해야 마땅하나 맹자는 다시 길을 떠나 예전에 공자가 들렀던 제나라로 향한다. 제나라 선왕宣王이 도읍지인 임치臨淄의 직문稷門에 직하관稷下館을 세워 천하의 학자들을 초빙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공손추'는 맹자가 제나라에 머물 때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는 또 떠난다. 선왕이 학자들을 초빙하기는 좋아했지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도정치와 패도정치 사이에서 또 다시 패도가 승리했다. 유가의 '궁달론窮達論'은 이러했다.
도연명의 시 '음주' 제5수를 주제로 한 그림.
'은거'라고 하면 대뜸 도가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사실 노자나 장자는 '은거'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현달'을 부정하였을 따름이다. 세속에 얽매이기를 부정하니 굳이 세상에 나서길 원치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도가의 '은거'와 유가의 '은거'는 함의가 다르다. 우선 유가의 '은거'는 일종의 기다림이자 준비이다. 반면에 도가의 그것은 단념이자 달관이다. 같은 은거라도 이렇게 다르다. 예를 들어 '장자·양왕讓王'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몸은 강이나 바다에 있으면서 마음은 위궐魏闕 아래 있다." 여기서 '위궐'은 조정을 말한다. 비록 은거하는 몸이긴 하나 마음과 시선은 언제나 중앙 조정에 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비난이자 조롱의 발언이다. 허나 유가의 '은거'는 마땅히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제갈량이 형주 양양 융중산에서 은거하면서도 천하를 요리할 대책(융중대隆中對)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명대 화가 사시신(謝時臣)의 그림 일부.
반면에 시은市隱은 저잣거리에서 은거한다는 뜻인데, 시끌벅적한 곳에서 세속과 어울리면서도 '은거'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초나라 삼려대부이자 중국 최초의 이름이 알려진 시인인 굴원屈原이 썼다고 하는 '어부사漁父詞'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성인은 외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과 더불어 옮겨가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어찌 그 진흙탕을 휘저어 물보라를 날리지 아니하고, 모든 이들이 취했다면 어찌하여 술지게미라도 먹고 묽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시오. 무슨 까닭으로 깊이 생각하고 높이 고개를 쳐들어 스스로 쫓겨나게 하시었소?" 문득 도연명陶淵明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귀거래사'를 주제로 한 이름없는 작가의 그림.
동진東晋에 태어나 나라가 망하고 송宋(유송劉宋)이 들어서자 은거의 길로 접어든 그는 이름마저 '잠潛'으로 바꾸었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34살 때 맡은 팽택현의 현령이다. 하지만 채 80여 일이 되기 전에 내팽개치고 귀향한다. "어찌 오두미五斗米에 목매여 의관정제衣冠整齊한 채 향리鄕里의 소아小兒(어린자식)에 불과한 독우督郵에게 허리를 굽히겠는가?" 이렇게 호언하고 '돌아가노라(歸去來)!'라고 하였으니 그때 심정을 읊은 것이 바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하지만 어찌 그리 단순한 일로 은거를 작심했겠는가? 세속이 싫었던 게고, 기질에 맞지 않았음이며, 무엇보다 유씨네 송나라에 이부종사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남긴 20수의 시 '음주飮酒'가운데 제5수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속에 초가집 짓고 살지만 수레며 말발굽 소리 들리지 않나니. 그대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묻는가? 마음이 멀리 있으면 처한 곳도 절로 외지고 고요하지 않을까(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그 유명한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니 멀리 남산이 눈에 들어온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다. 생각건대 '시은'을 가장 잘 표현한 시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일반적으로 중국인은 유가적 성품과 도가적 기질이 공존한다고 말한다. 입신양명을 바라는 것은 유가적이고, 소오강호笑傲江湖(강호에 은둔하며 세속을 비웃음)는 도가적이라는 뜻인데, 일면 맞는 말이긴 하나 대부분의 경우 순차적이다. 다시 말해 유가를 지향하다 좌절하여 도가로 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유가는 나름의 '궁달론'을 가지고 있다. 중국인의 인생철학에서 유가가 주, 도가가 종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유가의 입신양명은 '샹첸저우(向錢走)'(원래 앞으로 가다는 뜻인 '샹첸저우(向前走)'에서 '前'과 '錢'이 해성諧聲인 까닭에 시태를 조롱하며 만든 말이다)가 대체했고, 도가가 지향하는 은둔처(江湖)는 곳곳마다 관광객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조은朝隱(조정에 은거하다)'하며 생활 속에서 '은거'를 희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