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24)어느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황학주의 제주살이] (24)어느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 입력 : 2022. 03.08(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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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 되어도 좋다는 누군가의 허가를 받은 적이 없이 시인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 당시로는 드물게 시단에 시집을 들고나와 작품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작품이 죽었다는 누군가의 선고가 내리기 전에 내 스스로 작품이 안 된다는 느낌이 오면 펜을 놓을 작정입니다. 시인에겐 그 정도의 자기 판단 능력과 자유가 주어진 것이라 믿습니다.

시인이 시에 관해 말하는 게 드물고 소설가가 소설에 관해 말하는 일이 드뭅니다. 시에 관해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에 관해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다만, 시는 작지만 견고한 날개가 있다는 말을 해드립니다. 그게 떨림이든 의미든 정의든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으며 지푸라기를 날라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시가 어떻게 쓰이냐는 물음은 여행자가 노정에서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닮았습니다. 지금껏 나의 시란 문체 또는 스타일에 대한 선견이나 전략과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연인의 눈빛이나 가시나무 사이를 걸어온 종아리, 길가에 핀 수선화를 눈여겨보는 여정 속에 터득된 것이 배어 시로 나온 것일 테지요. 눈폭풍 들판에 꼼짝 않고 서 있던 조랑말이 여름 되어 산귤나무 고목 아래 조용히 서 있는 것처럼 그런 여정은 다음 정거장이 어디인지 물을 필요가 없고, 어디로 가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시 외에는 가진 것이 없으며 그것 말고는 이성의 불빛을 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반딧불 같은 빛일지라도 시는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고, 독자들을 이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부를 수 있는 자신만의 노래가 있고 들려줄 시가 있는 법이지요.

시는 외롭게 혼자 가지만, 진실은 복수로만 존재하기에 단 하나의 현실이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호테우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는 아이의 가슴에 눈부신 시가 있으며, 양부모의 폭행으로 숨진 정인의 눈빛에도 억색한 시가 있었고, 오물이 반죽처럼 엉켜 장화를 신고 다녀야만 하는 아프리카 슬럼가의 어린이 마음에도 알 수 없는 시가 들어있습니다. 그런 현실들을 시는 내적 여정을 통해 증거로 삼지만, 한편으로 시란 모든 것을 다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 있는 일 또한 아닙니다. 오히려 좀 헐겁고 자유로워 못다 한 말이 있어야 시라 할 수 있겠지요.

단 하나의 길만 남게 된 사람이 시를 쓰는 사람이라 믿었습니다. 스스로의 의식에 반성의 채찍을 들 수 없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러한 빈곤 속을 얼마나 걸어 여기에 이르렀는지, 돌아보면 시는 세상과 나 사이에서 나를 보호하려고 분투를 거듭한 듯도 합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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