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4)약속*-황인숙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4)약속*-황인숙
  • 입력 : 2023. 04.11(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약속*-황인숙




그렇게 떠난

그렇게 보낸



폐기종이여,

공동(空洞)이여,

덧없음이여, 그 게토여

슬픔과 부끄러움이 간헐적으로

불그죽죽 떠오르는 얼굴이여

구역질이여, 생이여, 어쩐지 비루함이여



- 내가 죽을 때 옆에 있어줘야 해!

- 그래 내 사랑,

네가 죽을 때 내 옆에 있어줘!

*시 '약속' 부분



삽화=써머



말문이 막히나 우리는 말의 주인인 적도 없고 말을 내 편으로 만들 재간도 없다. 가슴을 쥐고 코를 박은 채 누운 당신의 뒷모습을 봤을 뿐이다. 가가호호 약속은 만발하지만 담팔수 잎은 한 장씩 지고 당신이 죽으면 곧장 따라 죽겠어요, 라는 말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지독한 사랑도 때가 되면 문을 닫고 만다. 죽음이여. 네가 알아보는 사람은 누구이며, 너에게 넘어가는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내 사랑은 슬프다. 내가 죽을 때 내 옆에 있어 줄 수 없게 된 사람. 당신의 약속은 불발. 오, 불발이란 얼마나 많은 벚꽃들이 져야 하며 빗줄기들이 산을 찢으며 내려와야 하는가. 내 슬픔과 부끄러움을 타고 탈탈탈 밤거리를 헤매는 사랑한다는 말은 이제 늦었다. 고인이 되었다. 그러니 '구역질이여, 생이여, 어쩐지 비루함이여'. 내 약속 또한 동시 불발돼 벚꽃 죽고 벌건 짬뽕은 식어 문 앞에 놓였다. 한 쌍의 가락지는 영문도 모른 채 달빛 내리는 책상 위에 포개져 있다. <시인>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9561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