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4주년 기획 / 독도 출향해녀-기억의 기록] (1)프롤로그

[창간 34주년 기획 / 독도 출향해녀-기억의 기록] (1)프롤로그
독도 해녀, '강인함' 상징 넘어 여성 삶의 이야기로
  • 입력 : 2023. 04.20(목) 16:20  수정 : 2023. 07. 04(화) 18:34
  • 고대로 ·이태윤·강다혜 기자 bigroad@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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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지킴이 제주 해녀… 어업권 확보·영유권 사수 한몫
1940년대 최초 물질… 1950년대 후반부터 집단 이뤄 작업
전문가 "해녀 진출, 어업권 투쟁 넘어 '여성 삶' 주목해야"



[한라일보] 한라일보는 지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 연속 제주를 떠나 살고 있는 제주 출향해녀의 지난한 삶을 채록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제주해녀가 황금어장을 찾아 떠난 무대는 한반도를 넘어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뻗쳤다. 그 가운데 우리 영토 동쪽 끝 독도가 있다. 제주 해녀들의 물질은 수산물 채취를 넘어 울릉도와 독도 어민들과 함께 어업권뿐만 아니라 영유권을 지켜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독도 출향 해녀 발자취의 가치는 영토 주권 강화를 위한 근거 자료, 혹은 전승돼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흔히 제주 해녀는 '강인함'이자 근대화 과정에서 제주 경제를 이끌어온 주체로 상징되지만, 수치심과 고난함을 뒤로하고 바다에 뛰어들어야 했던 생업인이자 노동자의 삶의 이야기로서 기록돼야 마땅하다.



#제주 해녀, 다시 독도 땅을 밟다

지난해 7월, 70여 년 전 독도에서 물질을 했던 제주해녀들이 후배 해녀들과 함께 독도를 찾았다. 독도에 도착한 제주해녀들은 테왁 장단에 맞춰 노 젓는 소리인 '이어도사나'를 부르며 감회에 젖었다. 70여 년 전 독도의 제주해녀들은 궂은 날씨로 조업을 하지 못했을 때 임시 숙소를 마련한 서도 물골에서 노래와 춤을 추며 고향 제주를 향한 그리움을 나눴다.

1970년대 이후 독도에서 머구리 작업을 했던 고(故) 고순자 해녀의 생전 모습. 사진=제주해녀박물관 제공.

독도어장을 지켰던 제주해녀들은 당시의 기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물을 길어 갔던 기억, 갈대밭처럼 잘 자라난 미역을 호미로 베어낸 기억, 어른 손바닥보다 큰 전복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던 기억까지 선명하다.

현재 독도 물질에 나섰던 제주도 출신 해녀 5명이 울릉도에 거주하고 있다. 본보는 이들이 살아온 인생을 구술과 영상으로 채록하고, 올해 예정된 제주해녀들의 독도 방문에도 동행할 예정이다.

본보는 또 1905년 러일전쟁 당시에 독도를 불법 점거해 제주해녀들을 고용해 어장을 침탈했던 일본의 침략 흔적도 찾아 나설 예정이다. 일본인이 독도에서 어장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제주해녀를 데려다가 독도에 있는 전복채취 작업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고용된 해녀들이 겪었던 일화와 기록들을 추적한다.



#독도, 제주 해녀 '원정 물질' 현장으로

일제강점기 매해 3000명 이상의 해녀들이 제주를 떠나 한반도 전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 일대에서 활동했다. 해녀들이 채취한 생산품은 일본에서 양갱 혹은 과자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우뭇가사리·감태 등은 의약품·화약의 재료로 이용됐다.

독도 전경. 한라일보 DB

그러나 해방 후 해녀들의 어업 활동은 국내 어장으로 축소됐다. 어업 환경은 차별과 멸시로 더욱 악화됐다. 내륙의 해조류 어장 주민들은 자신들의 어장에서 독점적으로 활동하는 해녀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주 해녀들 풍속을 어지럽히고 어업 질서를 교란시키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활동 어장이 좁아진 제주 해녀들은 이 같은 수모와 유린 속에서도 생계를 위해 육지 어장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사실상 어업적 기반 붕괴와 함께 제주 해녀들의 독도 어업은 시작됐다. 1940년부터 시작한 제주해녀의 독도어업은 1956년에만 한 해 30~40명의 해녀들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학계에 따르면 1940년 경 일본인들이 제주 해녀를 고용해 독도에서 성게 채취를 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들은 장기간 거주한 것으로 추측되지는 않고 있다. 공식적으로 제주 해녀들이 독도에 거주했다고 기록된 시기는 독도의용수비대로부터 모집이 이뤄진 이후로 알려져 있다.



#'강인한 여성상' 넘어 삶의 기록으로

독도 바닷속을 누볐던 해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독도 거주인들의 자서전과 해녀들의 증언을 보면, 한 번에 30~40명의 해녀가 팀을 꾸려 독도를 찾았다고 한다. 해녀 50명과 보조원 20명 등 100여 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독도를 찾은 탐방객들이 선착장에서 주변 경관을 감상하고 있다. 한라일보 DB

이들은 독도 서도의 '물골'에서 몇 달씩 머무르며 물질을 했다고 한다. 물골은 독도에서 유일하게 빗물 고인 물이 있는 천연 동굴이다. 당시 독도를 찾은 해녀들이 숙박시설이 전혀 없던 독도에서 씻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는 동굴에 머물며 물질을 했다.

해녀들은 "독도에는 하루 종일 고된 노동 후에 씻을 수 있는 물이 없고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동굴이 고작이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대신 어장이 있었다. 육지 어장을 전전하며 방을 빌려 잠을 자고 주위 시선을 의식하며 물질하던 때와 달리 무인도였던 독도에선 방세 걱정도, 힐난이 깃든 시선도 없었다는 것이다.

결혼한 해녀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육아였다. 구좌읍 하도리가 고향인 조봉옥 해녀는 "1954년 세 살된 딸을 데리고 가는 대신 아기 업개로 시아버지와 시누이, 동네친구 2명과 함께 독도에 갔다", 양복순 해녀는 "3~6살 된 남매를 데리고 갔고, 이 남매는 어머니가 물질을 간 사이 두 명이 바닷가 근처에서 어머니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전한다.

김수희 독도재단 교육연구부장은 "당시 해녀의 삶에서 눈물 흘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라며 "제주 해녀의 역사를 보면 해녀의 진출, 독도까지 가서 어로활동을 했던 강인한 제주의 여성상으로 기록되지만 노동자로서, 특히 여성 노동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삶의 이야기다. 그것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팀장 고대로 정치부장·이태윤 차장·강다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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