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14)낙관-고재종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14)낙관-고재종
  • 입력 : 2025. 04.29(화) 03:00  수정 : 2025. 04. 29(화) 08:18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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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병든 먹감나무를 켜보면 속에 검은 물이 번져 있다

그걸 묵화 삼고 목판 윗녘에 다만

화제를 붙이는 화가여



나는 매화 가지에 걸린 보름달 밑에

보름달을 가로지르는 삭금(朔禽) 일가 밑에

삭금 일가는 더욱 그 면적을 넓혀가는

아무도 서명하지 않은 고요 밑에



붉은 낙관을 찍는다

삽화=배수연



오래되면 병이 드는 것이고, 안에 먹이 들어 있어야 먹감나무인데, 먹이 들어 있는 부분에서 의미하는 '병든 먹감나무'의 검은 물이 삶과 체험의 재료이며, 먹감나무 위에 기어올라가 보이는 수직을 목판이라 할 수 있다. 거기 "아무도 서명하지 않은 고요 밑에" 자신의 낙관을 깎아내느라면 다른 것은 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허무나 충일, 탐닉이나 판단으로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가지 끝에 이슬같이 맑은 달인지 굴욕 같은 서명으로 낙관이 붉은지, 삭금 일가는 알 수 없는 그림자로 달을 드나들지만 그게 질서정연한지, 고정된 시선에서 고요를 떼야 화제가 생기는지 더 이상 물을 수가 없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시'에 들어맞는다. 매화 가지에 걸린 점과 보름달을 가로지르는 선과 넓어지는 면에 이은 고요가 한 공간이요, 일찍이 먹감나무에서 켜낸 묵화가 그것이다. 일테면 해방된 연관성이라 해야겠지만, 의미는 정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있는 힘껏 목판 위에 주먹을 내리치는 황홀을 낙관이라 하는지 모른다. 일반적으로는 정신이라고도 하고 그 이상이라고도 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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