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23](6)최남단 하테루마로 가다

[표류의 역사,제주-23](6)최남단 하테루마로 가다
3부. 김비의와 오키나와
송환 노정에 오키나와 외딴 섬 반란의 기운
  • 입력 : 2009. 10.09(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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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남단 하테루마섬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진 너머로 쪽빛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시가키섬에서 배로 1시간 달려 도착하는 하테루마는 인구 600여명의 자그마한 섬이다. 한국에서 무슨 징표를 새기듯 마라도를 찾는 것처럼 일본인들도 최남단 섬에 발을 디딘 추억을 갖고 싶어한다. /사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1477년 12월 그믐 이리오모테섬 출발해 도착한 세번째 경유지
이시가키 거치지 않고 나하까지 이동한 배경 놓고 정치적 해석


김비의 일행이 이리오모테(西表)섬을 떠난 시기는 1477년 12월 그믐. 그들은 남풍을 기다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이리오모테 사람 5명이 작은 배 한 척에 함께 올라 제주인들과 동행했다. 한 낮을 가서 도착한 곳이 하테루마(波照間)섬. 우리의 마라도 같은 일본 최남단 섬이다. 성종실록은 하테루마의 지명을 '포월로마이(捕月老麻伊)'섬으로 기록해놓았다. 조선의 이 기록은 일본 학계에 논쟁 거리를 던진다. 지명의 유래를 둘러싼 해석이 그만큼 몇 갈래로 갈린다.

# '포월로마이' 유래 놓고 의견 분분

포월로마이섬의 어원을 인도네시아에 두는 학자들이 있다. 1954년, 12세기까지 선사시대의 전통적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보이는 하테루마섬의 패총 발굴을 통해 그같은 주장에 논거를 댔다.

그들은 패총에서 나온 돌도끼의 특징을 분석해 선사시대 하테루마가 속해있는 야에야마(八重山) 제도의 여러 섬에 인도네시아 문화가 존재했다고 밝힌다. 인도네시아계 종족과 문화가 오키나와 열도에 북상해 영향을 미친 점은 하테루마의 지명만이 아니라 김비의 표류기에 등장하는 요나구니섬의 장례 풍속, 귓볼에 구멍을 뚫어 검은 나무 조각을 끼웠다는 이리오모테섬의 여성 모습 등에서도 찾는다.

▲하테루마섬 마을 한가운데 있는 '야에야마의 영웅'아카하치의 탄생지 빗돌.

이같은 가설에 한편에선 반발했다. 일부 학자들은 '언어연대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교토 방언과 류큐국 슈리(首里) 방언의 분기 연대를 나누고 이 시기 일본 본토 언어의 침투가 김비의 표류기에 나오는 하테루마섬의 '독특한' 지명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15세기 김비의가 목격한 하테루마는 그 땅이 편편하게 넓고 산이 없으며 모래 바위로 이루어진 섬이었다. 둘레는 이리오모테섬에 비해 조금 작았다. 그 기록처럼, 이시가키(石垣)시에서 약 56㎞ 떨어진 하테루마는 자그만 섬이다. 섬의 주위가 겨우 14.8㎞에 이르고, 5개의 자연 마을에 600여명이 살고 있다.

이시가키 항구에서 하테루마로 향하는 배는 비날씨로 10분 늦게 출발했다. 1시간 걸려 다다른 섬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맑은 하늘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머지않아 소나기가 쏟아졌다. 최남단 표지석을 둘러본 뒤 하테루마 출신의 '영웅' 오야케 아카하치의 출생지로 발길을 돌리는 사이 세찬 빗줄기가 섬을 덮었다.

# 류큐 왕조에 맞섰던'영웅' 아카하치

주지하듯, 제주에서 표류해온 3명은 요나구니섬을 떠나 오키나와 본토 나하로 향하기까지 외딴 섬을 차례로 거쳤다. 김비의 일행의 '송환 루트'를 두고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야에야마 제도의 여러 섬을 지났는데 왜 이시가키에는 상륙하지 않았을까란 점이다. 오키나와에서 세번째로 면적이 넓은 이시가키섬은 현재 야에야마의 행정 중심지다.

이런 주장이 있다. 제주 사람들이 큰 바람을 만나 요나구니섬에 표착할 무렵은 당시 류큐왕국이 북쪽으로 토카라 해협까지, 남쪽은 하테루마까지 영토를 확대하던 때였다. 지배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때때로 군대를 출동해 저항 세력을 제압했는데 미야코(宮古)나 야에야마 제도의 여러 섬들은 이미 류큐 왕조에 복속해 있었다. 이시가키섬은 예외였다.

그 중심에 아카하치가 있다. 아카하치의 출생을 둘러싼 이야기는 바다에서 시작된다. 태풍을 피하기 위해 하테루마에 상륙한 이국의 배 선장이 섬의 여자를 만나 낳은 아이가 아카하치라고 전해진다. "네 몸 속에 자라고 있는 아이가 섬의 수호신이 된다"는 신의 계시를 받은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훗날 이시가키섬을 주축으로 그 일대의 유력한 수장이 된다.

아카하치는 "야에야마는 야에야마의 것"이라며 미야코· 야에야마 지역에 통일정권을 만들 꿈을 키운다. 류큐 왕조에 맞서야 했다. 1500년 2월, 류큐 왕조는 아카하치를 물리치기 위해 46척의 군선과 3000명의 군인을 보낸다. 미야코섬에 결집한 정부군은 그 섬의 수장이 이끄는 군대와 힘을 합쳐 아카하치 군사를 전멸시킨다. 역사교과서는 이를 '아카하치의 난'으로 기록해놓았다.

▲야에야마 여러 섬으로 향하는 뱃길이 이어지는 이시가키섬 시장 풍경. 김비의 일행은 류큐 왕조와 긴장 관계에 놓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시가키섬을 경유하지 않고 나하로 이동했다.

# 이리오모테섬에서 쌀·재목 들여와

류큐국의 역사에서 아카하치는 '반역자'일지 모르나 하테루마, 이시가키, 이리오모테 등 야에야마 제도에서 그는 '영웅'이다. 2006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나오키상 수상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의 장편 '남쪽으로 튀어'에도 아카하치에 대한 야에야마 사람들의 존경심이 그려진다. 하테루마섬의 마을 한가운데 세월의 때를 입은 채 서있는 아카하치의 탄생지 빗돌 주변은 성소처럼 느껴졌다.

김비의가 나하로 이동하던 시점은 아카하치의 난이 발생하기 이전이지만 일찍이 류큐 왕조와 별도로 '독립국'을 이루려던 이시가키섬의 기운이 있었던 탓에 송환 루트에서 빠졌다는 추정이 나온다.

이리오모테섬 소나이마을의 공민관장인 이시가키 긴세이(石垣金星·63)씨도 류큐 왕국과 이시가키섬 사이의 미묘한 정치적 긴장을 그 배경으로 언급했다. 거기에 덧붙여 표류인들에게 야에야마의 어떤 섬을 거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흘리지 않기 위해 다소 혼란스런 송환 루트를 밟았다는 주장도 꺼냈다. 직선 항로를 택하지 않은 사례는 이시가키만이 아니라 타라마(多良間)-이라부(伊良部)-미야코섬을 경유할 때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하테루마와 이리오모테는 일찍이 두터운 교류 관계가 있었다. 김비의 표류기엔 하테루마에는 논이 없어 쌀이 나지 않으므로 이리오모테섬에서 무역해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집을 지을 재목도 없어 그것 역시 이리오모테섬에서 가져와 얽는다고 했다. 요나구니에서 이리오모테로, 이리오모테에서 하테루마섬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섬사람들의 소박한 네트워크를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섬을 떠날 때 주민 아리씨가 항구에 나와 있었다. 섬에 다다른 후 잠깐 인사를 나눈 이였다. 이시가키 공민관장의 전화 한통에 잠시 생업을 접고 이방인들을 맞이해준 그였다. 아리씨는 이시가키로 출항하는 배가 하테루마섬을 빠져나오는 내내 부두를 지킨 채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최남단 섬과 작별을 고하는 항구엔 '갔다가 다시 오세요'란 펼침막 글귀가 선명했다.

/오키나와현 하테루마섬=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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