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24](7)구로시마에서 보낸 한달

[표류의 역사,제주-24](7)구로시마에서 보낸 한달
3부. 김비의와 오키나와
남풍이 데려다준 곳 지금은 '소의 섬'으로
  • 입력 : 2009. 10.16(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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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소들이 뜨거운 햇살을 피해 진초록빛 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구로시마는 인구보다 10배나 많은 2500마리의 소를 기르고 있는 섬이다. /사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성종실록엔 산호초 특성 표현한 옛이름 '훌이시마'로 기록
축산이 주요 산업… 인구보다 10배 많은 2500마리 소 길러

초록 나무 아래 떼지어 누워있는 것은 소였다. 그 섬엔 사람보다 소가 더 많다. 섬을 휘감아도는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느린 여행을 하는 관광객을 간혹 마주쳤을 뿐이다. 소가 더 자주 이방인들을 반긴다.

오키나와현의 외딴 섬 구로시마(黑島). 하트 모양의 외형을 한 채 바다에 떠있는 이 섬은 530여년전 제주사람 김비의 일행이 거쳐간 곳이다. 인구 230여명. 소는 그보다 10배 많은 2500마리를 기르고 있다. 섬 전체가 거대한 방목장인 말 그대로 소의 섬이다. 이시가키(石垣)시에서 남서쪽으로 18.5㎞ 떨어진 구로시마는 주위가 12.6㎞ 정도다. 김비의 표류기가 담긴 성종실록은 "그 땅이 편편하고 둘레가 가히 하루 걸리는 거리"라고 섬의 지형을 기록해 놓았다. 그 말처럼 산호초가 융기해서 생긴 평탄한 섬이 구로시마다.

▲관광객들이 자전거를 빌려타고 찬찬히 구로시마를 둘러보고 있다.



# 편편하고 둘레가 하루 걸리는 거리

어느덧 해를 넘겼다. 김비의 일행이 제주를 떠나온 게 1477년 2월. 세찬 바람에 떠밀려 낯선 땅에 표류했지만 '섬의 마음'은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본의 맨 서쪽 요나구니에 표착한 이후 이리오모테, 하테루마를 거쳐 아라구스쿠(新城)섬, 구로시마로 송환 노정을 밟아갔다.

구로시마에 앞서 경유한 아라구스쿠지마는 현재 인구 10여명에 불과한 아주 자그만 섬이다.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이 섬은 자연과 전통문화가 호흡하고 있다. 섬 사람들에게 그것은 대단한 긍지다. 성종실록은 아라구스쿠를 '포랄이(捕剌伊)'섬으로 기록해 놓았다. 김비의 일행이 목격한 섬엔 '겨우 40여채'의 집이 있었다. 그 땅이 편편하고 넓으며 산이 없는 아라구스쿠엔 쌀이 나지 않아 이리오모테에서 들여와 먹는다고 기록됐다.

아라구스쿠에서 한달 내외를 머문 표류인들은 남풍을 기다려 섬을 떠난다. 섬 사람 5명이 김비의 일행과 동행해 도착한 곳이 바로 구로시마다. 성종실록에 표기된 구로시마의 지명은 '훌이시마'. 산호초의 특성을 표현한 데서 유래한 구로시마의 옛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다.

김비의 일행은 구로섬에 머물렀던 기억을 끄집어내 기장·조·보리는 나지만 쌀은 없다고 했다. 아라구스쿠섬처럼 이곳 역시 이리오모테와 무역을 통해서 쌀을 공급받았다. 소를 도살해 먹지만 닭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했고, 과일 나무와 재목은 없다고 구술해 놓았다.

# 소를 도살해 먹지만 닭고기는 안먹어

섬에 도착해 구로시마 방문자센터를 찾았다. 1983년 개관한 이곳에선 섬의 자연·민속 자료 등을 펼쳐놓은 전시공간과 더불어 체험 프로그램이 이루어진다. 방문자센터를 지키고 있던 구로시마연구소의 특별연구원 미야라 데츠유키(宮良哲行·63)씨는 "제주에서 표류해온 사람들이 구로시마에 머무는 동안 썼던 말이 전해온다"며 한국어와 발음이 유사한 몇가지 어휘를 예로 들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했지만 표류인의 행적이 수백년에 걸쳐 전승되며 또다른 '전설'을 빚어왔음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구로시마 역시 섬의 역사에서 조선왕조실록에 쓰여진 몇줄의 기록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240년전쯤 큰 파도가 섬을 덮쳐 온 마을이 폐허가 된 경험을 안고 있는 구로시마. 밀려들고 빠져나가길 반복하는 파도처럼 섬은 수많은 이방인들을 맞아들이고 떠나보냈을 것이다. 섬의 남쪽엔 베트남 사람들이 표류했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다.

제주 사람 김비의 일행은 구로시마에서 한달 가량 체류한다. 이번에도 남풍을 기다려 구로시마 사람 8명이 그들을 데리고 한 배에 오른다. 오키나와 외딴 섬의 풍속은 제주인들에게 점점 익숙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그만큼 커져가고 있었다. 김비의는 '한 낮과 밤 절반'을 항해한 뒤 또다시 낯선 섬에 발을 디딘다.

/오키나와현 구로시마=진선희기자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고교 역사 교과서 김비의 표류기 상세히 소개

일본 오키나와 역사에서 김비의 표류기는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다. 미야코(宮古)·야에야마(八重山) 제도의 역사를 더듬어갈 때 김비의 일행이 구술해놓은 외딴 섬의 기록들은 대부분 '최초'라는 이름이 따라붙는다. 그 섬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문헌을 뒤지다보면 늘 그 첫 머리에 조선왕조실록의 김비의 표류기가 등장한다.

이 때문일 것이다. 오키나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제주 표류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오키나와역사교육연구회 아라시로 도시아키(新城俊昭)가 집필한 '고등학교 류큐·오키나와사'에는 김비의 표류기가 상세히 소개됐다. 2001년 초판 발행 이래 4쇄를 찍어낸 역사 교과서다.

김비의 표류기가 실린 대목은 '대교역시대의 류큐'란 이름이 달린 3장에서다. 김비의 일행이 오키나와에 표착한 이래 송환 노정에 포함되었던 미야코·야에야마제도의 역사와 더불어 '조선인 표류민'들이 기록한 15세기말의 류큐를 소개해놓았다. 이 시기를 미야코·야에야마의 '군웅할거'시대라고 언급한 뒤 그에 얽힌 여러 사건에 뒤이어 김비의 일행의 행적을 실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1477년 2월 조선 제주도의 배가 난파당했을 때 널판지에 의지했던 3명이 요나구니 어민들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썼다. 요나구니에서 반년을 체류한 것을 시작으로 이리오모테, 하테루마, 구로시마, 다라마, 이라부, 미야코섬 등을 거쳐 나하에 도착한 뒤 1479년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말도 덧붙였다.

역사 교과서는 성종실록에 쓰여있는 것처럼 요나구니에서 나하에 이르는 아홉곳의 견문기를 일일이 적었다. 이 교과서는 조선의 정사(正史)인 성종실록에 실린 제주사람의 류큐 체험 기록을 두고 "고류큐(古琉球) 시대 미야코·야에야마 지역의 사회·풍속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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