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던 작은 섬나라 류큐왕국의 상징인 세계문화유산 슈리성. 이곳에서 화려한 의상과 우아한 움직임이 특징인 류큐무용 상설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김비의 일행의 표류기에는 슈리성과 나하의 번화한 모습을 반영하듯 화려한 풍물이 구술되어 있다. /사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미야코 주민 15명과 동승 1478년 여름 류큐국 도착목가적 원시공동체 요나구니섬 풍물과 확연한 차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일본 오키나와현 슈리성(首里城). 중국과 일본 본토의 영향을 받으며 오키나와 특유의 건축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슈리성은 '해양국'으로 통했던 류큐왕국의 상징이다. 아시아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슈리성 공원을 안내해 놓은 한국어판 소책자에는 "슈리성은 류큐왕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이자 류큐 전체에 널리 퍼진 신앙의 거점이기도 했다"고 소개해 놓았다.
▲지난 7월 오키나와를 찾았을 때는 슈리성 정전에 대한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 류큐국왕 거리 행렬 등 상세히 묘사
지난 7월 슈리성을 찾은 날도 상설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오키나와 전통 예능은 그 대부분이 류큐왕조 시대에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환영하기 위해 시작된 춤·무용·음악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중 화려한 의상과 우아한 움직임이 특징인 류큐무용은 오키나와 주요 공연장이나 문화 시설에서 수시로 선보인다. 슈리성도 대표적 상설 공연장이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야외 무대에 설치해 놓은 간이천막 아래 앉은 수십명의 관광객들은 꼼짝않고 공연을 지켜봤다.
1477년 2월 오키나와현 최서단 요나구니섬에 표착한 김비의 일행은 1478년 여름 류큐국에 다다른다. 미야코섬 사람 15명과 한 배에 타고 이틀 낮과 반쪽 밤을 항해한 끝에 도착했다. 지금의 오키나와현 나하(那覇)에 발을 디딘 제주사람들은 요나구니섬에서 미야코섬까지 이어지는 여정에서 만나지 못했던 화려한 풍물을 목격한다. 이들은 마침 류큐국왕과 어머니가 놀러나가는 것을 본다.
"옻칠을 한 수레를 타고 사방으로 발을 드리웠는데, 수레를 맨 사람은 거의 20명으로 모두 흰모시 옷을 입고 비단으로 머리를 싸매었습니다. 군인들은 긴 칼을 지니고 활과 화살을 매어 앞뒤로 둘러싸 호위하며 거의 1백여명의 사람이었고, 쌍 뿔고동과 쌍 태평소를 불며 총을 쏘았습니다. 아름다운 부인 4~5명이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흰 모시로 된 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김비의 일행의 나하 견문기는 22개 항목에 걸쳐있다. 밤에 여러 놀이를 벌이는 데 이를 보려는 남녀들로 길이 채워지고 거리가 넘쳐났다. 해안으로부터 왕궁까지의 거리는 10여리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색깔있는 비단을, 수령은 얼룩박이 물들인 겹비단으로 상투를 싸고 희고 가는 모시옷을 입는다. 밥은 쌀로 짓고 소금과 간장을 이용해 국을 만들고 채소를 곁들여 넣는데 간혹 육고기도 쓴다. 남쪽 오랑캐 술이 있는데, 색깔이 누렇고 맛은 소주와 같지만 아주 맹렬해 몇 잔을 마시면 크게 취한다. 남쪽 중국인과 남쪽 오랑캐 사람들이 모두 장사하는 일로 오고감이 끊이지 않는다.
▲슈리성 상설공연 모습
# 번영의 절정기 놓인 무역도시 나하
오키나와현에서 펴낸 한국어판 '오키나와의 문화'에 따르면 1429년 류큐왕국 수립 이후 제3대 쇼신왕(尙眞王) 시기는 '황금시대'다. 오키나와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번영된 시대였다. 김비의 일행이 도착한 때가 바로 쇼신왕 시대다. 슈리에는 옻칠한 왕궁과 사원이 줄지어 있고, 국제 무역도시 나하에는 화교의 거리가 있었다. 그곳은 무역으로 방문하는 남방인이나 일본 본토 사람들로 붐볐다. 중국 도자기, 강렬한 남방주, 향신료 등 외국의 고급제품도 쏟아졌다. 해외 무역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사람과 상품이 모여든 나하에 비하면 요나구니섬은 목가적 원시공동체에 가까운 곳이었다. 김비의 일행은 그 커다란 차이에 놀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하에서 지낸지 어느덧 3개월. 류큐왕국의 번성에 입을 다물지 못한 것도 잠시, 김비의 일행의 머릿속엔 다시 고향이 떠오른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주라고 청한다. 김비의, 강무, 이정 세 사람은 이제 제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오키나와현 나하=진선희기자
류큐대학 토미야마 교수 "표류기 남기는 바다 특별한 역사의 공간"
"바다는 평소엔 일상적인 길이지만, 조난이 발생하면 특별한 길이 됩니다. 표류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에 얽힌 기록은 현대에 중요한 역사적 정보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류큐(琉球)대학 교육학부 토미야마 카즈유키(豊見山和行) 교수. 김비의가 나하로 이동하기전 체류했던 미야코섬 출신이다. 10년전 제주 우도를 찾았던 그는 당시 뱃길 체험에서 화두를 꺼낸 '바다의 신앙'이란 글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에 걸친 해역에는 영험하다고 알려진 항해 수호신으로서 마조와 관음 등이 존재했다"면서 "관음 신앙은 아시아 해역에서 보편적인 항해 수호신으로 존재했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토미야마 교수는 는 김비의 표류기가 15세기 오키나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김비의 기록의 정확성을 두고 놀란다. 김비의가 글을 쓸 수 없었던 백성으로 여겨짐에도 여러 섬의 생활상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구술해놓았기 때문이다. 제주 표류인들은 요나구니섬, 이리오모테섬 등 오키나와현의 외딴 섬을 두루 거쳤는데 그곳의 풍습을 일일이 풀어냈다. 오키나와 본토만 해도 견문 내용이 22개 항목에 이른다. 그곳을 포함해 9개 섬을 거쳐가는 동안 경험한 견문사항을 모두 합치면 100개 항목이 넘는다.
"외부의 시선으로 본 오키나와 외딴 섬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김비의 표류기를 소개해 놓았을 것입니다. 정치성을 배제하고 제주와 오키나와가 표류를 통해 민간 교류를 했다는 점에서 김비의 일행의 표류는 상징성이 큽니다. 이제는 민간 차원에서 그같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토미야마 교수는 김비의 일행이 다행히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오키니와에 표류했던 사람들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표착지의 주민들에게 구조돼 식량과 의복을 제공받기도 했지만 노예로 팔려가는 일도 있었다. 그는 김비의가 표착할 당시엔 조선과 유구 사이에 송환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고, 그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표류기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