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27](10)남쪽 섬 중심지로 가다

[표류의 역사,제주-27](10)남쪽 섬 중심지로 가다
쇠솥 쓰고 누룩술 빚는 또다른 섬문화 세밀히 남겨
3부. 김비의와 오키나와
  • 입력 : 2009. 11.20(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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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라항이 보이는 미야코시 일부. 항구 부근에 있었던 마을에 김비의 일행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오키나와 본토 가까운 미야코섬에서 한달 가량 체류
경유해온 야에야마 제도와 풍속 등 비교 차이점 기록


오키나와 본토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비의 일행이 이라부(伊良部)섬을 떠나 다다른 곳은 미야코(宮古)섬. "1개월을 머물고 남풍을 기다려 섬사람 5명이 우리를 데리고 작은 배에 같이 타서 한 낮을 항해하여 어느 섬에 도착하였는데, 섬 이름이 멱고(覓高)시마였고, 호송인들은 다음날 자기네 섬으로 돌아갔습니다."

# 집에 뒷간 있고 밥지을 때 쇠솥 사용

미야코섬에 이른 김비의 일행은 이곳이 지금까지 거쳐온 야에야마(八重山)제도의 문화와 얼마간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아챈다. '성종실록'의 기록은 그 점을 보여준다. 언어·음식·집·모양새·풍속이 대개 요나구니섬과 같지만 의복은 타마라섬과 같다고 했다. 밥을 지을 때 쇠솥을 쓰지만 발이 없고 가마와 비슷한데, 이는 유구국에서 무역해 사온 것이라고 구술한다. 집에는 뒷간이 있었다. 술을 빚을 때는 이라부섬처럼 누룩을 쓴다.

김비의 일행이 미야코섬을 찾았던 1478년은 섬의 지배세력이 막 바뀐 때였다.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였지만 이미 1390년쯤부터 류큐와 교류했던 미야코는 이른바 '선진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남쪽 섬의 중심지'역할을 했다. 김비의 일행은 표류기에서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 7월, 미야코향토사연구회부회장을 맡고 있는 카즈히로 시모지(下地和宏·63)씨를 히라라(平良)항 근처에서 만났다. 히라라항은 미야코시 주변 섬을 드나드는 뱃길이 모여드는 곳이다. 카즈히로씨는 옛 지명을 언급하며 설촌 역사 등을 따져볼 때 김비의 일행이 머물렀던 곳이 바로 그 부근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김비의 전후에도 조선에서 미야코에 표착한 일이 있지만 그처럼 자세히 이 지역에 대한 기록을 남긴 예가 없습니다. 생활풍습 같은 게 너무나 상세해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연구자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우에노 독일문화촌'은 19세기 미야코섬에 표류했던 독일 상선을 구조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널찍한 문화촌 규모에 비해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의 발길은 뜸했다.

# 표류의 기억 담은 '우에노 독일문화촌'

미야코시립박물관엔 김비의 일행이 일본 오키나와현 요나구니에 표착한 뒤 각 섬을 돌며 견문한 여정이 전시되어 있다. 미야코섬의 역사를 꿸 때 김비의 일행의 표류기가 빠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섬에서 표류는 다반사일 게다. 예고없이 찾아드는 사건이지만 섬 사람들은 누구하나 쉬이 물리치지 않았다. 미야코시에 있는 '우에노 독일문화촌'은 그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1873년 7월 독일의 상선이 중국을 출발해 호주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미야코섬 우에노미야구니 앞바다에서 난파당한다. 이를 발견한 주민들은 횃불을 켜서 구조의 신호를 보낸다. 날이 밝자 마을 사람들은 오키나와의 전통배를 타고 거친 파도를 헤쳐 승무원을 구했다. 독일인들은 한달간 미야코섬에 머물며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장의 보고를 받은 독일 황제는 섬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미야코에 박애기념비를 세운다. '독일상선 조난의 비'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우에노 독일문화촌'은 박애기념비를 활용해 지역 활성화를 꾀할 목적으로 1996년에 문을 열었다. 중세시대 독일 성(城)을 재현해놓은 건물에 전시관, 기사의 공간, 어린이 체험관 등을 갖추고 있다. 미야코섬을 방문한 독일 수상의 기념비가 건립되는 등 일본과 독일 교류에 이 공간이 활용되고 있지만 방문객들의 발길은 뜸하다. 이즈음의 관람객들에게 독일 문화 체험은 매력적인 자원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숱한 표류인들이 오고갔던 공간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제주의 현실에선 드넓은 대지에 자리한 미야코섬의 '독일 문화촌'에 눈길이 갔다.

미야코섬에 도착한 첫날, 도심 건물위로 보름달이 휘영하게 떠올랐다. 동행한 카즈히로씨가 문득 물었다. "지금 제주에서도 저 달이 보이겠지요?" 거친 바다를 지나 여러 섬을 떠돌게 된 김비의 일행이 미야코섬에 머물 때도 오늘처럼 달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530여년전 제주 사람들은 그 달을 보며 제주에 두고 온 낯익은 얼굴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을지 모르겠다.

미야코향토사연구 카즈히로씨 "섬의 차이 파악한 김비의 미야코 연구에 귀한 인물"

"김비의가 표류했을 당시 류큐왕국엔 표류민을 제 나라로 송환하는 제도가 갖춰 있었다고 봅니다. 여기에 인적·물적 교류를 토대로 형성된 섬과 섬의 네트워크가 더해졌을 겁니다. "

카즈히로 시모지(미야코향토사연구회 부회장·미야코시사편찬위원회 위원)씨는 김비의 표류기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야코섬에 대한 기록이 드문 현실에서 조선왕조실록의 김비의 표류기는 미야코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귀한 단서가 되고 있어서다.

요나구니섬을 거쳐 이리오모테, 하테루마, 구로시마, 타라마, 이라부섬 등을 건넜던 김비의 일행은 미야코가 지금까지 지나온 섬의 문화와 다르다는 걸 파악하고 있었다. 반년 가량 체류했던 요나구니섬의 기억을 더듬으며 경유지의 풍속이 그것과 무엇이 다르고 닮았는지 매번 지적한다. 그래서 오키나와현의 여러 섬에서 김비의 표류기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미야코섬도 예외가 아니다. 카즈히로씨는 "김비의 표류 기록은 미야코와 야에야마 제도의 차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밝혔다.

김비의 일행은 미야코섬을 떠날 때 주민 15명과 한배를 타고 이틀 낮과 반쪽 밤을 항해해 오키나와 본토에 도착했다. 지금은 7~8시간이면 미야코에서 뱃길을 이용해 오키나와 본토 나하로 갈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은 삶의 속도를 빠르게 변화시켰지만 섬의 마음은 그대로다.

"조선인들이 미야코에 표착했을 때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낸 일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후 미야코 사람들이 조선에 표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낯선 땅에서 두려움에 떨던 미야코 사람들은 조선인을 구해준 기억을 떠올려 필담으로 '류큐인'임을 알렸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도 미야코 사람들을 따뜻이 받아들여 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김비의 일행이 거쳐간 사연에 더해 한국과 미야코섬의 깊은 인연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제주는 우리와 참으로 가까운 섬"이라고 덧붙였다.

/오키나와현 미야코섬=진선희기자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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