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섭리란게 참으로 오묘하다. 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여름엔 과연 겨울이 올까? 의심이 들고, 혹한의 겨울엔 여름이 올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영락없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대로 우리를 맞는다. 지난 여름도 비교적 더웠던 터였을까, 겨울은 커녕 가을도 오지 않을것만 같았는데 이젠 아침 저녁으로 아주 선선한다. 때로는 쌀쌀하기까지 하다.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로 접어들자 사람들이 활기를 띤다. 7~8월 더위에 축 늘어졌던 몸이 생체리듬을 찾아가고 있다고 할까.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수개월을 뒤로하고 남은 몇개월 여유를 갖고 싶어지는 것은 가을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 때문일게다. 그 안정감은 '슬로우'다. 대부분이 원하는 가을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슬로우 라이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슬로우 라이프, 역시 대표적인게 걷기다. 정말 행복하게도 제주섬은 걷기와 관련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하드웨어를 지니고 있다. 한라산 주변으론 청정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코스 대부분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속 길이다. 걷는 사람 입장에선 자신이 길을 개척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또 올레길, 걷기를 논할 때 역시 빠질 수 없는 제주의 자랑이다. 제주의 특색에 맞게 해안을 따라가는 코스가 있는가 하면 바다와 오름이 연결되기도 한다. '올레'라는 브랜드는 수년전 일본으로 수출되기까지 했다. 올레길이 첫 선을 보인 지난 2007년 이후 지난해까지 약 8년간 560만명이 넘는 탐방객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 10명 중 1명이 올레길을 목적으로 왔다는 분석이다. 제주의 관광상품으로도 자리매김했다. 올레길은 걷기 열풍을 가져온, 신이 제주에 준 선물이기도 하다. 오름 또한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하는 도시인들에게 안성맞춤 코스이기도 하다. 도내 곳곳에 위치한 휴양림에도 사람들이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필자는 아직 걷는 즐거움이 낯설다. 10㎞가 넘는 장거리 코스는 거의 걸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얼마전 숲길을 걷는 행운(?)을 누렸다. 약 6~7시간에 걸쳐 코스를 완주한 몸은 엉망진창이 됐다. 온몸이 쑤셔댔다. 걷기 초짜가 베테랑도 힘들다는 숲길을 걸었으니 오죽했을까. 사실 걷는 내내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는것도 벅찬데 한눈 팔새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필자의 눈엔 앞서가던 베테랑들도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유있는 걷기라기 보다 앞만 보며 걷는, 코스 완주가 주목적인듯 하다.
필자의 지인 한명은 아내하고 딱 한번 함께 올레길을 다녀온 이후 다시는 함께 걷지 않는단다. 이유는 아내가 싫어해서란다. 싫다는 이유는 천천히 걸어서이기 때문. 지인은 천천히 걸으며 주변 풍광도 두 눈에 담고 지치면 쉬어가는 올레길의 미학을 교과서적으로 체험하려 했지만 아내는 너무도 빨리 걸어 따라가느라 너무 힘들었단다. '힐링'하려다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투덜거렸다. 그래서 '길은 혼자 걸어야 제 맛'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걷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목적이 될 수 있겠지만 자연이 준 선물꾸러미를 풀어가는 재미를 놓치면 너무 아깝지 않을까. 슬로우 라이프 공간에서 패스트 푸드를 찾는 격이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숲길이나 올레길을 어떻게 걸으셨습니까? <김성훈 편집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