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칼럼]만장굴 발견 70주년, 부종휴와 꼬마탐험대

[한라칼럼]만장굴 발견 70주년, 부종휴와 꼬마탐험대
  • 입력 : 2016. 09.20(화)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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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보물, 만장굴이 세상에 드러난 때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이다. 만장굴의 처음과 끝의 전모를 밝힌 때가 그해 10월초다. 전인미답의 만장굴의 실체와 태고의 신비를 세상에 처음 알린 때다. 70년 전의 일이다. 그 주역은 당시 김녕국민학교 6학년 담임이던 한산(漢山) 부종휴(1926~1980) 선생과 그의 코흘리개 제자들이다. 부종휴는 이들을 '꼬마탐험대'라고 불렀다.

꼬마탐험대 대원은 횃불(조명)반, 유류운반(보급)반, 측량반(기록) 등 3개팀에 30명쯤 됐다. 제대로 된 조명이나 장비도 없이 횃불과 짚신에 의지해야 했다. 이들의 살아 있는 일화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불굴의 탐험정신이 일궈낸 놀라운 성과이자 상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만장굴 발견 이듬해 1947년 2월24일 졸업을 앞둔 꼬마탐험대의 마지막 조회가 열렸다. 조회가 열린 김녕국민학교 운동장에서는 '만장굴' 이름 명명식이 이어졌다. 명명식에서 꼬마탐험대의 대장 부종휴는 상기된 얼굴로 단상에 올라 "1947년 2월24일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 될 것입니다. 그대 이름은 만장굴이여!"라고 외쳤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이야기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자, 제주 세계지질공원 대표명소인 만장굴을 세상에 알린 최초의 역사다. 이들의 동굴 탐험은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쾌거였다.

이 뿐이 아니다. 부종휴의 족적은 너무나 크고 뚜렷하다. 만장굴뿐만 아니라 빌레못동굴, 수산동굴, 미약굴 등 제주의 수많은 용암동굴이 그에 의해 빛을 발했다. 한라산 곳곳을 누비며 약 330여 종의 식물을 직접 찾아내어 한라산의 진가를 알렸다. 한라산 식물이 1800여종이나 된다는 주장도 그의 연구 성과 드러난 것이다. 한라산을 천연보호구역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제주인으로서 한라산과 동굴 탐사를 비롯해 고고학, 산악활동을 넘나들며 근 1세기 동안 그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도 드물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사람들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기념관은 커녕 공적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스승 부종휴와 함께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탐험정신과 용기를 보여준 꼬마탐험대원들의 이야기도 세월이라는 지우개에 지워져 갔다. 현재 5명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부종휴 선생과 꼬마탐험대에 대한 기념사업이 희망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15년 부종휴 선생 기념사업회를 위한 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부터다. 올들어 지난 7월에는 기념사업회가 공식 발족했다.

만장굴 발견 70주년을 맞아 부종휴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첫 결실을 앞두고 있다. 만장굴 전모를 확인한 1946년 10월의 의미를 되새겨 다음 달 말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만장굴 최초 탐험 일화를 형상화한 기념 조형물 제막식이 열린다. 당시 부종휴와 꼬마탐험대가 몸담았던 김녕초등학교도 기념사업을 추진 중이다. 부종휴 선생이 남긴 업적을 집대성하는 사업도 이어진다. 유족 소장 자료, 논문, 보고서, 신문 및 방송자료 등 부종휴 선생이 남긴 자료를 총정리하고, 생존 당시 함께 활동했던 지인들의 구술채록 작업과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을 통한 관광자원 개발도 함께 진행된다. 만장굴과 부종휴, 그리고 꼬마탐험대의 새로운 역사가 70년 만에 다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강시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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