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에서 백두까지'는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 자주 등장했던 구호다. 반독재를 외치는 현장에서 민주주의와 분단 극복, 평화통일을 나타냈다. 정권으로선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 시대는 확실히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자연스레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면 그렇다. 남북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어가 됐다. '한라에서 백두까지'를 이어주는 중심에 제주 감귤이 있다. 청와대는 지난 11일 감귤 200톤을 북에 보냈다. 남북 대화와 한반도 비핵화 국면에 감귤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주 감귤은 진작부터 남북을 이어주는 평화의 과일이었다. 감귤은 1999년 처음 민간주도 형식으로 북에 보내졌다. 이후 2010년 천안함 폭침으로 인한 5·24조치로 중단되기까지 4만8328t을 북에 보냈다. 북은 그 답례로 수차례에 걸쳐 제주도민을 초청했다. 감귤이 남북 대결구도를 허물고 분단을 뛰어넘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감귤보내기를 두고 '비타민 C 외교'라고 한 이유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감귤은 도민에게 있어서 애증의 과일이다. 무엇보다 혹독한 진상으로 인한 고통이 컸다. 감귤 진상은 '고려사'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 2년(476년) 4월 탐라에서 방물을 헌상하였다는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후 고종 31년(1893년)에야 진상 제도가 없어졌다. 무려 1500년 동안이나 진상에 시달렸다. 바람이나 해충에 의해 떨어진 귤마저 백성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니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그렇게해서 보낸 감귤을 나눠주고 과거를 시행하기까지 했다. 황감제(黃柑製) 또는 황감시(黃柑試), 감시제(柑試製) 감제(柑製)라고 했던 특별 과거시험이다. 명종 19년(1564)에 처음 시작된 황감제는 숙종때부터는 거의 매년 열렸다. 제주도에서 감귤을 진상하면 일부를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눠주고 시재를 내려 그들만을 대상으로 과거를 보도록 했다. 유생들의 사기를 높이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다. 고혈로 짜낸 감귤을 먹으면서 과거를 보는 그들에겐 백성들의 고통이 안중에나 있었을까.
감귤이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1911년 들어서다. 그해 서귀포 홍로성당의 프랑스 출신 다케신부가 일본에서 온주밀감을 들여오면서 농가 소득작목으로 재배되기 시작한다. 이후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 재배되면서 '대학나무'라 불릴 정도로 각광받았다.
감귤이 과거의 진상품에서 '대학나무'를 넘어 남북간 평화협력과 통일로 나아가는 나무가 될 수 있을까. '한라에서 백두까지' 대결구도를 끝내고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까.
분단구조를 허물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섬나라라고 할 수 있다. 남북 평화협력은 섬나라에 갇힌 인식의 지평을 압록강, 두만강 넘어 대륙으로 확장시킨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 시발점이 제주도가 된다면 궁극적으로는 미래 제주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감귤 보내기까지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의 편협한 사고부터 벗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도 신동엽 시인이 시 '껍데기는 가라'에서 한 외침은 유효하다. " … /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분단에 기대는 냉전적 사고, 대립과 갈등, 폭력이나 무력 등과 같은 것들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사라져야 할 것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다. 가시밭길일지라도 '한라에서 백두까지'는 가야만 하는 길이다.
<이윤형 행정사회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