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에 내렸다. 3번 출구로 나와 우사단로10길로 꺾이는 길어귀로 접어들었다. 이슬람교 중앙성원까지는 구불구불 완만한 오르막길이었다. 화려하게만 보이던 이태원의 풍경은 갈수록 추레해졌다. 도로에는 할랄 레스토랑과 식료품 가게가 늘어섰다.
16명의 화가들이 10·29참사 추모전 '푸른 도화선(Green Fuse)'을 열고 있는 전시장으로 가는 길. 여기서부터는 꼬불꼬불 완만한 내리막이다. 낯선 외국어 간판을 단 이국풍의 식당과 술집들이 한국의 산동네와 어우러진 곳. 고깃집 문 앞에는 연탄재가 켜켜이 쌓여 있다.
화가들이 전시를 마련한 뜻은 이태원에서 자유를 꿈꿨던 희생자들의 '푸른 청춘'을 기억하고 치유와 위로를 주기 위해서다. 추모전 이름은 영국 웨일스 시인 딜런 토머스의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 힘이'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 시의 첫대목이다.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 힘이/푸른 내 나이 몰아간다. 나무들의 뿌리를 시들게 하는 힘이/나의 파괴자다./하여 나는 말문이 막혀 구부러진 장미에게 말할 수 없다./내 청춘도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졌음을.'
전시장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근처 가게 주인은 뒷골목을 가리키며 지하실로 내려가라고 했다. 한참을 우왕좌왕하다 전시 포스터가 붙은 벽면의 문을 열었다. 좁고 어두운 계단 아래 밝은 빛이 보였다. 밝은 조명 아래 작품들만 덩그러니 나를 반겼다. 주혜인 화가의 메모가 나를 노려보았다. 부디 용서하지 말고 기억하기를!
푸른 도화선은 전시장 밖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 골목길을 따라 녹사평역 3번 출구 광장으로 내려왔다. 시민분향소가 차려진 곳이다. 두 줄로 길게 늘어선 추모객 틈에 끼어 향을 올리고 국화꽃을 바쳤다. 영정사진 속 그들은 모두 젊고 예쁜 장미꽃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조롱과 혐오를 뿜어대는 고성능 스피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경찰관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 독사는 쉬지 않고 붉은 혀를 날름댄다.
권력은 거리에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가. 이 공포를 정치인들이 없애 주리란 기대는 사라지고 있다. 유족들이 흐느꼈다. 그들의 절규와 항의는 곧 추위와 어둠 속에 묻혔다.
분향을 끝낸 사람들은 시민추모제가 열리는 이태원역을 향해 긴 줄을 이어 걸었다. 무대 위 스크린 속 검푸른 밤하늘에는 별들이 외치고 있었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별 하나, 별 둘 추억의 영상과 함께 희생자의 이름이 불렸다. 49일이 지나면 망자는 이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의 길을 가고 산 자는 산 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왜 죽었는지 해명이 되지 않으면 죽은 자는 귀신이 돼 구천을 헤매고 산 자는 한을 품는다. 그리고 복수를 다짐한다. 한번 불붙은 도화선의 불꽃은 뇌관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