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역사 탐라의 역사]주변국과 다각적 국제관계·교류 있었다

[섬의 역사 탐라의 역사]주변국과 다각적 국제관계·교류 있었다
  • 입력 : 2003. 02.05(수) 12:15
  • /이윤형기자 yhlee@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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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탐라가 백제에 복속된 시기이후의 유물이 있을까
(2)탐라후기 대외관계와 사회상

백제와의 국가간 첫 공식관계(476년, 문주왕 2년) 이후 탐라는 다양한 대외교섭을 갖는다.
 역사의 무대에 전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유물을 기준으로 할 때 이 시기는 탐라후기에 해당된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기로 정치적 격변기에 접어든다.
 제주섬은 토착적인 곽지리식 토기에서 고유 브랜드라 할 수 있는 고내리식 토기 단계로 문화변천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 탐라의 국제관계와 교류상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탐라는 백제 문주왕 2년에 사신을 파견, 조공(朝貢)외교를 펼치지만 바로 속국관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실질적인 속국관계는 이보다 뒤쳐진 동성왕 20년 498년 이후 백제 멸망(660년)때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백제멸망 직후인 661년부터 탐라는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의 급변하는 정세에 발빠르게 대응한다. 그 해 당과 일본에 동시에 사신을 파견하고, 이듬해에는 신라와 관계를 맺는다. 일본과의 관계는 661년 이후 9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모두 15회 이상 나타난다.
 이처럼 탐라는 5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후반까지는 백제와, 그 이후 삼국통일 뒤에는 통일신라와 관계가 이어진다.
 7세기 후반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응한 주변 고대국가와의 다각적인 국제교류와 독자적인 외교행보는 탐라국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의 대외관계 및 교류상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있을까.
 탐라후기를 대표하는 고내리 유적과 용담동 제사유적, 곽지리 패총 4지구, 금성·종달리 유적이 주목된다.
 토기생산의 거점기지인 고내유적에서는 8∼9세기대 통일신라양식의 회색도기가 다량으로 출토된다. 회색도기는 모두 한반도로부터 수입된 물품들이다. 이러한 영향 탓인지 고내리식 토기는 제주에서 만들어진 고유 브랜드지만 기본 제작방식은 회색도기의 영향을 받았다.
 용담동 제사유적에서도 도장무늬 등이 시문된 통일신라시기의 병과 항아리가 주로 출토된다.
한 곽지패총 4지구와 금성리 유적, 종달리 패총에서도 이 시기의 회색도기가 나온다.
 이러한 회색도기는 어디서 왔을까.
 전남 영암 구림리의 대규모 도기가마터와 경주 안압지 유적 출토 회색도기군에서 형식적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 남부와의 교류 결과로 보여진다.
 그런데 제주도 출토 회색도기는 기종이 한반도 남부지방에 비해 한정적이다. 작은 항아리와 큰 항아리 편병류 등 호류와 병류 위주로 출토될 뿐 끓이는 용도인 식기용이나 제의용 그릇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상생활 용기는 고내리 유적처럼 점차 전문화된 토기제작방식이 보급되면서 지속적으로 개량화, 자체 수급이 가능해 졌거나 목기(木器)로 대신할 수 있었던 때문으로 풀이된다. 회색도기의 영향은 이후 일반 질그릇인 옹기의 제작 발전을 가져오는 바탕이 된다.
 이 뿐이 아니다.
 일본과의 빈번한 교섭을 반영하듯 ‘일본서기’에는 661년 탐라가 해산물을 바치고 도끼 26자루, 낫 64자루, 도자(刀子) 62매 등을 받아갔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처럼 탐라후기는 주변 고대국가와의 다각적인 국제관계와 다중적인 문화교류가 펼쳐지는 시기다. 이는 탐라의 정치지배체제가 본궤도에 진입했음을 방증한다.
당시 탐라의 사회상은 어떠했을까. 이와 관련 주목되는 문헌기록이 있다.
 중국 ‘당회요’(唐會要)의 7세기 기록에는 “성황(城隍)은 없고 5부락으로 나누었다(分作五部落)”는 표현이 보인다. 또 “호구(戶口)는 8천이 있고, 문기(文記)는 없으며, 오직 귀신을 섬긴다”고 했다.
 여기서 ‘성황’이 없다는 것은 지배계층의 궁전이 있는 성곽 같은 시설물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호구 8천’에 대해서는 당시 인구수로 보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7세기 후반의 탐라는 인구 8천명을 넘지 않는 소국으로 추측된다. 또한 다섯개의 큰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다섯개의 큰 부락은 어디일까.
 ‘고려사’ 지리지의 삼성건국설화에는 양·고·부을나(乙那)가 거주하는 곳을 각각 제1·2·3도(都)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주지’ 같이 순서를 바꿔 고씨가 제1도에 거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각에서는 제주시를 중심으로 1도 2도 3도와 화북동 일대의 ‘별도’(別徒) 및 광령을 포함한 ‘외도’를 아울러 5도, 즉 5부락으로 추정한다. 또 1·2·3도를 제주·대정·정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고고학적 유물·유적으로 볼때 대규모 유적지인 삼양 용담 광령·외도를 중심으로 한 대촌(大村)을 우선 설정할 수 있다. 여기에다 서북부의 곽지패총을 비롯 애월 고내 귀덕지역, 남부의 중문 포함 상예동 일대 및 신례리 지역, 종달리 유적을 중심으로 한 동북부 지역이 유적이나 고인돌(지석묘) 분포로 보아 5부락 위치로 거론될 수 있다.
 이것을 고려 충렬왕 26년(1300년)에 설치된 14개 현촌, 즉 귀일 고내 애월 곽지 귀덕 명월 신촌 함덕 김녕 호촌 홍로 예래 산방 차귀 등과 비교할때 상당부분 중복되는 점은 시사적이다.
 그럼에도 이 시기 가옥구조의 흔적을 보여주는 생활유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점은 고고학적 접근의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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