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 문화유산 다시 읽기](20)제주갈옷

[제주섬 문화유산 다시 읽기](20)제주갈옷
섬의 햇빛과 바람이 만든 자연물감
  • 입력 : 2007. 08.17(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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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감물염색업체 직원들이 감물염색천을 햇볕에 널어 말리고 있다. 감물염색천은 햇빛에 뒤척이며 마르는 동안 무지개같은 색색의 빛깔을 낸다. /사진=제주시 한림읍 옛 명월초등학교에서 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공적인 자리엔 꺼리던 노동복 갈옷
천연염색 붐 타고 일상속으로 성큼
쑥·칡 등 복합염색으로 색다른 빛깔


지난 4일 제주시 한림읍의 옛 명월초등교. 책 읽는 소녀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하는 이 곳에 감물염색업체가 입주해있다. 아이들이 뛰놀던 잔디밭 교정을 가득 채운 것은 울긋불긋 감물염색천이었다. 쨍하고 내리쬐는 햇살아래 염색천들은 몸을 뒤척이며 자연이 만들어내는 물감을 한껏 품었다.

장마가 물러난 이맘때쯤이면 감물염색을 하는 사람들은 바빠진다. 감이 나는 제철인데다 햇볕을 쬐기 좋은 시절이라 예전부터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너나없이 감물 염색을 들였다.

조선시대 기록인 김상헌의 '남사록'(1601년)을 보면 제주 사람들은 '가죽띠와 미투리에 칡베옷을 입었다'고 나와있다. 또한 '부인은 치마가 없고 다만 삼새끼로 허리를 동이고 두어자 베로 새끼 앞뒤에 기워서 아랫 부분을 덮을 뿐"이라고 적었다. 이런 현실에서 일상복, 노동복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흔히 갈옷으로 통칭되는 감물염색 옷은 노동복중 하나였다. 언제부터 입었는지 확실치 않다. 멀쩡한 천에 감즙을 들이기보다는 입던 적삼, 속곳, '몸빼'(일본식 여성용 바지)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헌 옷을 새롭게 활용할 때 감물염색이 쓰였다.

일본인 이즈미 세이치의 1930년대 제주기록인 '제주도'를 보면 갈옷을 갈적삼, 갈중이, 갈굴중이로 나눠 소개했다. 갈적삼은 말그대로 웃옷인 적삼에 감물을 들인 것이다. 갈중이는 감물을 들인 하의를 말한다. 갈굴중이는 여자 하의를 따로 부르던 이름이다.

이즈미 세이치는 이 책에서 "갈굴중이 모습으로 농사나 그 밖의 노동에 종사할 수 있지만 공적인 일에서 예의를 갖출 때는 그 위에 희거나 검은 치마를 입지 않으면 결례가 된다"고 썼다. 그러면서 당시 조천면 함덕리에서 동쪽 해촌까지의 여자들은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아 다른 마을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았다고 덧붙여놓았다.

갈옷이 노동복 이외의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이겠다. 홑옷이라 따뜻한 시기에 주로 입었지만 1년을 통해 섬사람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옷이기도 했다.

집집마다 토종감이 있었을 무렵엔 저마다 감물을 들였다. 7~8월쯤 떫은 맛이 나는 감을 따내 큼지막한 그릇에 넣고 잘게 부수어서 감즙을 낸다. 여기에 옷을 펴고 감즙이 고루 스미도록 하는 데 이때 감찌꺼기를 탁탁 털어낸다. 짧은 시간, 감찌꺼기가 달라붙던 표면은 얼룩이 생긴다. 물을 적셔가며 비날씨를 피해 고루 말려야 풀기가 생기고 빛깔도 거무튀튀해지지 않는다.

현재 도내에 있는 감물염색업체는 10여군데로 추정된다.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는 만큼 감즙을 짜낼 때 더러 기계의 힘을 빌리지만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감물염색천을 햇볕에 반듯하게 펴말리는 일은 어지간히 힘이 든다.

1989년 '꽃반지 끼고'로 알려진 제주출신 가수 은희가 '봅데강'이란 브랜드를 내놓은 것을 계기로 갈옷이 일상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갈적삼, 갈중이에서 벗어나 생활한복 시장에 감물염색이 퍼졌다. 지금은 자켓, 원피스, 아동복, 모자, 지갑, 넥타이, 머리띠 등 만들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만든다.

이 과정에 복합염색이 등장한다. 감즙에 쑥, 칡, 먹물 등을 더해 붉은 황토빛으로 인식되던 기존 갈옷의 색상을 다양화시켰다. 자연친화적인 제품을 선호하는 흐름을 타고 천연염색인 감물염색은 최근 10년동안 시장이 커졌다. 실제 감즙을 들인 옷은 항균성, 자외선 차단성이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와있다. 한 감물염색업체의 양순자 대표는 "오래된 고가구 느낌이 나는 갈옷에서 생활의 운치와 멋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감물염색은 이제 더 이상 제주만의 '전통문화상품'이 아니다. 경북 청도군, 전남 나주시 등은 감물염색을 비롯한 천연염색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 감물염색업체를 운영하는 김부현 대표는 "지난 2월 청도군을 다녀왔는데 염색 제품 개발과 홍보에 매우 적극적이더라"면서 "갈옷을 만들어파는 제주 사람으로서 위기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모자말고 다른 것은 없나요"

갈옷 디자인 개발·소비층 확대 전략 필요


갈옷을 사서 입어본 적이 있습니까? 제주대 의류학과 홍희숙 교수는 2004년 도내 20~50대 여성소비자 4백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갈옷 구매 경험이 없는 소비자가 전체의 85.1%로 구매경험이 있는 소비자를 크게 앞질렀다.

이 조사에서는 40~50대 소비자들이 갈옷 구매경험과 갈옷 구매의사가 높은 것으로 나와 있지만, 30대 소비자들도 갈옷 구매의사가 40~50대에 비해 높았다. 20대 소비자들은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갈옷 구매지연 이유가 디자인 선호성, 유행성 부족이었다. 홍교수는 "20대 소비자들에게 갈옷은 더 이상 전통복식이 아닌 현대복식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상품 개발 과정에 그들이 선호하는 디자인 감성을 잘 반영한다면 이들 또한 틈새 시장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도내 감물염색업체의 사정은 어떨까. 세 군데 업체를 돌아봤는데, 개발된 상품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디자인이나 색상에서 브랜드별로 약간씩 차이를 보였고 가격대가 달랐다.

한동안 천연염색 붐을 타고 감물염색에 관심이 쏠렸을 때 일부 품목의 물량이 달리기도 했다. 한 업체에서 내놓은 제품의 반응이 좋으면 곧바로 다른 업체에서 비슷한 디자인의 감물염색 상품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하고 상품화를 거쳐 수익을 뽑아내기까지의 과정에 들어가는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은 탓도 있다. 도내 소비시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인지 감물염색업체의 브랜드 이미지가 강하지 않다. 이는 현재 도내 감물염색업체가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홍 교수는 "천연염색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아직도 갈옷은 대중화가 덜 되었다"면서 "환경친화적인 삶에 대한 의식이 널리 퍼지고 예쁘고, 세련된 디자인이 더해질 때 갈옷도 제대로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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