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첫 순례지로 꼽히는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의 너분숭이에 있는 애기무덤들. 세찬 겨울 바람을 온 힘으로 견디고 있는 소나무 아래 제주 4·3의 어린 영혼들이 잠들어 있다.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중편 '순이삼촌' 나온지 올해로 꼭 30년째1949년 북촌리 학살 명료한 언어로 드러내시신처럼 널브러진 비석이 그날의 참상을
○… "아, 너무도 불가사의하다. 믿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전대미문이고 미증유의 대참사이다. 인간이 인간을, 동족이 동족을 그렇게 무참히 파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다. 짐승도 그런 떼죽음은 없다."(현기영의 '쇠와 살'에서)
4·3을 두고 하는 말이다. 60년전, 제주섬에 불어닥친 비극을 맨 먼저 드러낸 것은 문학이었다. 4·3이 제주도민에 드리운 상처가 얼마나 큰 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고발했다.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나오고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기전, 이미 문학은 4·3의 진실을 분명한 언어로 담아왔다.
오랜 세월 제주 사람들의 삶을 짓눌러온 4·3을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방식으로 품어안은 작품속으로 떠나보자. '4·3문학의 현장'이란 이름으로 연재한다. …○
나무토막을 하늘높이 던져올렸다 땅에 부려놓으면 그럴까. 꼿꼿하게 서 있어야 할 비석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다. 흡사 널브러진 시신 같았다. 그 비석들 사이로 우뚝 선 비가 있다. '순이삼촌'이란 네 글자가 또렷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분숭이 일대. 현기영(67)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곳이다. 중편 '순이삼촌'은 1978년 '창작과비평' 가을호를 통해 발표됐다.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꼭 30년째가 된다.
"'순이삼촌'은 제주도 청년들만을 의식화시킨 책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섬 곳곳에 제 명을 누리지 못하고 숨져간 그날의 원혼들이 아직도 중음신이 되어 떠돌고 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시절 금기에 도전하던, 이 땅의 많은 청년들의 각질화된 의식을 깨는 데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10년전, 이재무 시인은 현기영씨에게 띄운 편지에서 그렇게 썼다. '순이삼촌'은 그랬다. 4·3이 30년전(소설 발표 당시)의 해묵은 사건이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깊은 우울증과 찌든 가난밖에 남겨준 것이 없는 고향. '나'는 이틀간의 휴가를 간신히 따내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 제사를 찾는다. 촌수는 멀어도 이웃에 살아 기제사에 왕래하며 각별한 사이였던 순이삼촌의 안부가 궁금해 물었더니 며칠전에 죽었다는 답이 돌아온다. 집단학살의 현장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순이삼촌은 오랜 후유증을 앓다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순이삼촌의 죽음은 '나'를 30년전의 제주섬으로 데려간다.
"오누이가 묻혀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의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순이삼촌')
북촌리 4·3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너분숭이는 4·3때 무장대 기습에 의해 군인 2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돼 음력 12월 19일(1949년 1월 17일) 군 토벌대에 의한 대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그 일로 3백여명이 일시에 목숨을 잃었는데, 그 전후 4·3으로 인해 희생된 북촌리 사람은 4백36명에 이르는 것으로 본다.
"그때 혼자 살아난 순이삼촌 허는 말을 들으난, 군인들이 일주도로변 옴팡진 밭에다가 사름들을 밀어붙였는디, 사름마다 밭이 안 들어가젠 밭담 우엔 엎디어젼 이마빡을 쪼사 피를 찰찰 흘리멍 살려달렌 하던 모양입디다."('순이삼촌')
▲흡사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는 듯하다. 조천읍 북촌리 옴팡진 밭에 들어선 현기영의 '순이삼촌' 문학비. /사진=김명선기자
희생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김석보(72) 북촌리 4·3유족회장도 동생 셋을 잃었다. 사건 당시 그의 나이 열세살. 너분숭이에는 20여기의 애기무덤이 오종종하게 모여있는데, 이중엔 김 회장의 동생을 비롯해 4·3으로 희생당한 아기의 무덤이 더러있다. 그는 현기영씨가 '순이삼촌'을 집필하기전 북촌리에 취재왔던 것을 기억해내며 "내가 경험한 일들을 다 털어놨다"고 했다.
'순이삼촌'은 모두가 침묵할 때 등장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작가는 4·3을 정면으로 들춰냈다. 소설속 '서울말 일변도의 내 언어생활이란 게 얼마나 가식적이고 억지춘향식이었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표절인생이지 나 자신의 인생은 아니었다'는 대목은 중의적으로 읽힌다. 고향에서 일어난 비극을 모른체 한다면 작가로서 '가짜 글'을 쓰는 게 아닐까라는. 1975년 등단하면서 고향 얘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던 작가는 그로부터 3년 뒤 제주사람의 육성으로 4·3을 문학에 녹여낸다. 그것은 명료한 언어였다.
"아니우다. 그대로 그냥 놔두민 이 사건은 영영 매장되고 말거우다. 앞으로 일이십년만 더 있어봅서. 그때 심판받을 당사자도 죽고 없고, 아버님이나 당숙님같이 증언할 분도 돌아가시고 나민 다 허사가 아니우꽈? 마을 전설로는 남을지 몰라도."('순이삼촌')
너분숭이 일대는 이즈막에 4·3유적지 복원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변신'이 한창이다. 순이삼촌이 비극적 생을 마감한 옴팡밭에는 '순이삼촌'문학비가 세워졌다. 40대 초반의 조각가 고민석씨가 제작을 맡았는데 여느 문학비와 다르다. 잿빛 제주석에 소설속 문장을 올올이 새겨 눕혀놓았다. 이달중 순이삼촌이 누워있는 형상의 조형물을 추가로 설치하면 작업이 마무리된다.
건너편엔 북촌4·3기념관이 지어지고 있다. 외형은 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해선 고민거리다. 유적지 복원을 위한 공사 과정에서 주변 돌담, 애기무덤 등의 원형을 훼손시켰다는 일각의 불만이 나왔던 터라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