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34. 행원 마을학살터와 위령탑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 34. 행원 마을학살터와 위령탑
마을 유지들 마을 한 복판에서 몰살
  • 입력 : 2008. 01.22(화) 00:00
  • 최태경 기자 tkchoi@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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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주민들을 집결시켜 놓고 마을 유지들을 몰살시킨 조합장·반장 학살사건의 현장인 당시의 공회당 자리.

옛부터 '어등포'라 불리우던 행원리는 구좌읍 동북부 해안에 위치한 전형적인 반농반어의 마을이다. 4·3 당시에는 3백여 세대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최근 이 마을은 농공단지와 육상양식단지, 그리고 풍력발전단지의 설치와 더불어 인구의 증가 등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4·3 당시의 그 참혹한 기억들은 행원리 주민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이것은 다른 마을과 달리 대부분의 주민희생이 마을복판에서 벌어졌으며 이 참혹한 광경을 모든 주민들이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마을 주민들의 성금으로 4·3 당시 희생당한 영령들을 위로하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조합장·반장들의 억울한 죽음



4·3 당시 행원리에서 일어난 '조합장·반장사건'은 주민들의 뇌리 속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이 날의 일은 1948년 11월 19일 오전 9시쯤 제9연대 12중대 토벌군인들에 의해 마을 책임자들인 조합장·반장을 포함한 28명이 마을 공회당에서 한꺼번에 총살당한 사건이다.

이날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오자 마자 공포를 쏘며 주민들을 공회당으로 모이도록 했다. 일부 주민들은 돼지우리나 소꼴더미에 피신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공회당 앞에 모이자 토벌군인 책임자가 "한동리 경찰관 모친 피살사건에 이 마을 청년들이 포함돼 있고, 마을에서 산사람들에게 협조한다"며 마을청년 수명과 조합장, 반장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기 시작했다.

토벌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삼창까지 강요하여 반인륜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북 사투리를 쓰는 서북청년단들이 주축이 된 군인들은 약 3 시간 동안 도피자 가족의 가옥을 불태우는 등 마을을 쑥밭으로 만든 후 떠나버렸다.

주민들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인근에 임시 토롱했다가 사태가 잠잠해지자 가족, 친지들에 의해 감장됐다.

이날 희생된 행원리 마을 주민은 박치욱(73), 강원현(65), 이순구(62), 장남윤(60), 박의식(50), 장남순(50), 강주봉(45), 이원백(45), 김수석(43), 고창운(42), 한기범(40), 박영추(38), 김귀영(35), 고종렬(28), 고춘일(27), 김기선(27), 고준식(21), 윤춘필(70), 이승구(50), 채철석(19), 강순규(13), 강태영, 김경수 등이며 강태영 등 두 사람은 즉사하지 않았지만 얼마 뒤 곧 숨졌다.

"당시 3조합 반장이었던 아버지는 장남인 나를 눌속에 숨기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공회당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옆 집들이 타는 연기 때문에 눌속에서 나와 공회당 쪽으로 뛰어갔습니다. 뛰어가던 중에 군인을 만났는데 늦게 간다며 발길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공회당으로 가서 옆집 삼촌 등뒤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조합장, 반장들이 담옆에 일렬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겁에 질린 아버지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이 때만 해도 마을 유지 전부를 죽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계급장을 단 군인이 하나 둘 셋 구령과 함께 권총을 쏘자 군인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습니다. 사람들은 꼬꾸라졌고 담벼락은 총탄으로 허연 연기를 뿜었습니다."

김윤칠씨(76)의 생생한 증언이다. 그는 이후로 축성작업을 끝낸 후 17세의 나이로 육군에 입대하여 죽음의 세월을 피할 수 있었다.



곱은재우영서 학살 이어져



행원마을 인근에 소재한 '곱은재우영'은 밭 모양이 기역자로 굽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합장·반장학살사건'이 벌어진 이후, 행원리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피 입산하게 된다. 1948년 12월13일 이웃마을 월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서청 특별중대가 들이닥쳐 주민들을 속칭 '곱은재우영'에서 학살했다. 이날의 학살사건은 '연대봉' 아래쪽으로 성을 쌓아 보초를 서던 중 추위를 막기 위해 불을 지핀 것이 봉화 신호를 했다는 이유로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다가 그 전날 무장대들이 삐라를 뿌림으로써 토벌대를 자극한 게 이유가 되기도 했다.



마을수난사 증언하는 유적들



이날 희생된 행원리 주민들은 강태일(41), 고사만(38), 강태옥(26), 강윤봉(24), 김태현(22), 김춘길(21), 김춘봉(21), 안기문(21), 이신호(21), 강태경(20), 김용택(20), 강태빈(19), 임호배(19) 등 20여명에 이른다.

1949년 1월18일에도 토벌대는 '행원리는 빨갱이 소굴'이라며 이응문(31세), 윤태경(28세), 임선익(21세), 고득보(17세) 등을 '곱은재우영'에서 학살했다.

행원리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아무 이유없이 마을 유지들인 조합장과 반장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 있는 권한이 누구한테 있었는지를. 이 사건 이후 당한 여성들의 수난을, 소와 닭을 잡아 상납했고, 그들의 취사실에 물까지 길어다 바쳐야 삶이 보장되었던 그 죽음의 시절을.

지금 현재 조합장·반장 사건이 있었던 옛 공회당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바로 그 자리에 신축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어서 4·3 당시의 현장은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행원리 마을회관 앞이 학살 현장이다.

곱은재우영의 기역자 모양의 밭은 그대로이나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행원리 마을 회관에서 북서쪽 2백미터 지점에 창고와 민가 한 곳이 떨어져 있는데 민가 뒤쪽에 위치해 있다. 행원리 주민들은 이외에도 쉬영물, 오름생이 등지에서 피신해 있다가 토벌대에 의해 죽어갔다. 행원리는 '조합장·반장 사건'과 '곱은재우영 학살사건' 등 굵직한 집단학살을 겪으며 4·3으로 인해 1백2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현장에서 만난 사람 / 김재문씨

"지독한 연좌제의 사슬이었습니다"

김재문씨(64·사진)는 4·3당시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조합장·반장 학살 사건으로 잃었다. 당시 행원리에는 6조합에 12반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1조합 반장이었으며 외할아버지는 2조합장이었다.

"당시 나는 5살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네 오누이가 공회당에 가서 학살현장을 지켜보았는데 저는 어려서 기억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사는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성장해서 군대에 갔습니다. 그러나 신원조회의 별지참조 때문에 책임있는 보직을 맡아보지 못했습니다. 제대를 한 후 경찰에 10여년 근무를 했는데 여기서 연좌제의 실체를 알게 되었던 거죠. 그 내용은 행원리의 조합장, 반장이 폭도조직의 조합장, 반장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황당한 일이었죠."

그는 현재 4·3유족회 구좌읍 지회장을 맡아 진상규명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행원리 4·3희생자위령탑을 건립할 때도 총무를 맡아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행원리의 위령탑은 우리 주민들 스스로 모금을 하여 세워졌다는데 자부심을 갖습니다. 4월3일날 일찍 위령제를 지내고 평화공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체 기금이 없어서 나중에 관리가 안되어 흉물이 될까 걱정입니다."

<오승국 4·3연구소 이사>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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