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11)김석희의 '땅울림'

[4·3문학의 현장](11)김석희의 '땅울림'
좌도 우도 아니다, 탐라공화국이 있었다
  • 입력 : 2008. 04.18(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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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속 노광동의 배경이 된 제주시 노형동 광평마을은 4·3으로 온 마을이 불바다에 잠겼던 곳이다. 야트막하게 남아있는 돌담과 대숲이 그 날의 흔적을 희미하게 품고 있다. /사진=강경민기자

4·3 당시 산으로 피했다 동굴서 36년을 보낸 사내
소설속 노광동은 노형+광평마을에서 붙여진 이름
"제주섬 본래의 숨결 지키려 노력했던 흔적에 유념"


한 사내가 동굴속에서 발견된다. 폭과 높이가 10m, 길이가 50m쯤 되는 굴이었다. 사내는 제주시 노광동 출신의 현용직. 그는 1949년 2월부터 1984년 10월까지 무려 36년간 굴 속에 숨어 살았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김석희씨(56)의 소설 '땅울림'(1988)은 그에 얽힌 사연을 풀어간다.

"막상 일이 터지고 나자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했다네. 산에 숨어들어가 있던 사람들만 들고 일어난 게 아니라, 섬 곳곳의 주민들 중에도 가담한 숫자가 적지 않았거든. 그리고 그들중엔, 물론 좌익들의 정치적 선동이나 협박에 넘어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제주도를 독립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네."('땅울림')

현용직은 4·3 당시 산으로 피해 들어갔다는 소문을 끝으로 행불처리된 인물이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평범한 은행원이 되고 싶었던 농촌 출신의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던 그가 현실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서울에서 제주도로 돌아온 직후 제주도청 국기게양대에 내걸린 성조기를 보았을 때였다.

"왜 이곳에서까지 성조기가 나부껴야 하는가." 현용직은 과거 35년동안 국기게양대에 걸려있던 일장기가 성조기로 바뀌었을 뿐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사내는 자연스레 제주도의 지난한 역사를 되새긴다.

제주섬은 1002년 화산폭발의 참극을 겪은 뒤 1105년 탐라군으로 전락했고 다시 현으로 격하된다. 뭍의 중앙 정부는 언제 한번 애정을 가지고 제주도를 대한 적이 있었던가. 제주섬이 육지에 복속된 이래 고려조 수량의 난과 번석 번수의 난, 조선조 무술년 방성칠난과 신축년 이재수난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난에 가담한 섬사람들의 흉중에는 육지로부터 독립하여 옛날의 탐라왕국 시절로 돌아가고픈 복고적 이상주의가 면면히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은 지방신문 사회부기자인 김종민이 써놓은 현용직 노인에 대한 기록을 얼개로 짰다. 동굴속에서 걸어나온 현용직의 삶을 바탕에 깔고 4·3의 전개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써내려간다. '땅울림'에서 그려지는 4·3의 전모는 소설이 발표된지 15년뒤에 나온 4·3진상조사보고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탐라공화국'이라는 다섯글자다.

▲지금의 제주한라대학 부근에 방일이, 함박이굴 등 노형동 자연마을이 들어서 있었지만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남문통에서 삼성혈로 꺾어드는 성내 변두리의 길 모퉁이에, 서청 출신의 경찰관 하나가, 예리한 날 끝으로 가슴과 어깨를 찍힌 채 꽁꽁 얼어붙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 옆 담벼락에는 '탐라인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라고 적힌 종이쪽지가 핏물에 젖은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땅울림')

소설속 김종민은 현용직이 가담한 '탐라인'의 존재를 통해 4·3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4·3 사건을 좌익과 우익간의 정치적 싸움판이었다는 식으로 도식화시키는 역사서술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나는 다만, 그 사건의 흐름 속에서 강렬하게 살아 숨쉬었던 순수지향의 의지, 달리 표현하자면 제주섬 본래의 숨결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흔적들을 유념할 뿐이다."

현용직이 태어나고 죽은 소설속 노광동 형평부락은 노형과 광평마을을 짜맞추어 만든 지명이다. 노형은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정 사람들이 난을 일으켰을때 제주읍내로 가는 초입에 위치한 노광동 사람들의 동조여부가 난리의 정당성에 대한 판정이었고, 그것은 결국 제주읍민들의 가세여부를 결정짓는 시금석이었다는 내용은 실제 노형의 역사와 들어맞는다.

제주시 노형동 광평마을에 줄곧 살고 있는 현창용씨(76)는 4·3을 온 몸으로 지나온 이다. 그는 "4·3으로 적어도 노형 사람 5백명이 죽었다"면서 "광평마을은 4·3으로 모조리 불에 탄뒤 가까스로 재건이 되었지만 인근 방일이, 함박이굴 등 몇몇 자연마을은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고 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김석범 '화산도' 옮기며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내년쯤 귀향하는 김석희씨

"전국을 휩쓰는 물난리가 났을 때에도, 내 심중에서는 단 한곳, 제주도의 안위만이 걱정되었을 뿐이다. 이처럼 배타적인 성격을 눈치챈 친구들은 흔히 '섬놈기질'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비난에 대해 한번도 변명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속으로는 음흉한 만족감을 느꼈었는지 모른다."

'땅울림'에 나오는 이 대목은 왠지 작가의 고백처럼 읽힌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제주를 떠난 그는 이후 대부분을 타향에서 보내고 있다. 소설속 김종민처럼 서둘러 서울을 떠나 제주로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애월 해안도로 인근에 집을 마련해두고 빠르면 내년에, 아니면 그 이듬해에 귀향할 계획이다.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그해 '실천문학' 여름호에 4·3을 소재로 한'땅울림'을 발표했다. 사회부 기자가 남겨놓은 기록을 마치 논픽션인양 그려내는 소설은 말미에 각주까지 달았다. 각주도 어디까지나 소설이지만 4·3과 관련된 자료를 상세히 담고 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할 것 같은 픽션과 논픽션을 아예 떼어놓자는 생각으로 각주를 끌어썼다.

이 작품은 '이상의 날개'(1989)라는 창작집에 담겼는데 또다른 4·3 소설인 '고여 있는 불'도 함께 실려있다. 현기영의 '순이삼촌'처럼 같은날 제사 풍경이 이어지던 고향에서 흘러나왔던 4·3 이야기가 두 소설을 낳았다.

하지만 김씨는 '땅울림'을 발표하던 즈음에 번역에 빠진다. 알다시피, 그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한 이가 바로 그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넘나들며 '털없는 원숭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 '고야 평전'등 1백여권을 번역했다. 제1회 한국번역상 대상도 받았다.

번역의 첫머리에 놓이는 작품이 우연찮게도 4·3 문학이다. 소설가 이호철의 권유로 제주출신 재일동포 작가인 김석범의 '화산도'를 번역하게 된 것이 1987년이었다. '화산도'는 4·3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이다. 4·3 소설이 들어있는 김석범의 또다른 중단편집인 '까마귀의 죽음'(1988)도 우리말로 옮겼다. 이중 원고지 1만매가 넘는 분량의 '화산도'는 그가 번역가의 길을 걷는 전환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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