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13)강중훈의 '오조리의 노래'

[4·3문학의 현장](13)강중훈의 '오조리의 노래'
우리, 더러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자
  • 입력 : 2008. 05.02(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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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 아래 그림같은 해안 풍경이 펼쳐지는 성산읍 앞바르 터진목. 강중훈 시인은 학살현장인 이곳에서 아비의 시체를 거두었고 꾹꾹 눌러뒀던 그 기억은 반세기뒤 '오조리의 노래'로 살아났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여행객 넘실대는 일출봉 아래 앞바르 터진목

그 학살 현장에서 아비를 거뒀던 여덟살 소년

"덜 서러워야 눈물나"… 절제된 그날의 노래



야트막하게 자란 유채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천원을 내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다. 젊은 여자가 물허벅 여인상을 껴안고 활짝 웃었다. 웃옷을 맞춰 입은 남녀는 하트 모양의 그네를 탔다. 성산포는 늘 희망에 부풀어 있다. 번잡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다.

노오란 유채밭에서 조금밭 비켜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알다시피, 빼어난 풍광을 품고 있는 제주섬의 관광지중 거개는 4·3유적지다. 성산일출봉이 그림처럼 뒷배경을 차지한 터진목도 그런 곳이다.

'내 고향 오조리 봄은/ 바당애기 혼자/ 집을 지킨다// 얼마나 외로우면/ 소라껍질에 뿔이 돋는가/ 그 뿔에/ 송송/ 젖부른 어미의 숨비질이 뜨는가//왜, 바당애기는/ "아버지란"란 소리 한번 못 해봤는지//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반평생/ 호-이 호-이/ 숨비질 소리만 질긴 뜻을/ 말하지 마라//제주도의 사월 바람은/ 거슬러 날라오는 소리개의/ 발톱'('오조리의 노래'중에서)

강중훈 시인(68)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네 살때 제주로 왔다. 그리곤 줄곧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에서 자랐다.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서둘러 고향길에 올랐다. 조국을 되찾은 그곳에서 이제야말로 떳떳하게 살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아내는 왠지 못미더워했다. 오사카에서 이대로 살자고 했다. 그 일로 부부는 말다툼이 잦았다.

시인의 아버지가 꾸었던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1948년 11월 성산리 앞바르 터진목에서 희생당했다. 모슬포에서 군 생활을 했던 시인의 작은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게 원인이었다. 토벌대는 시인의 가족을 '폭도'로 지목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등을 끌고 가 죽음으로 내몰았다. 시인이 여덟살때였다.

아버지의 시체를 거둔 것은 시인이었다. 동남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인은 학살 소식을 듣고 나이든 친척들과 함께 터진목으로 향했다. 시인의 눈에 해안가에 쓰러진 시체들은 멸치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널브러진 듯한 풍경이었다. 죽음이란 게 이렇듯 가벼운 것이구나. 시체를 치우던 소년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을 햇볕이 무진장 쏟아지는 고향길/ 우리 더러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자// 지금쯤 되새김 하는 부랭이/ 들풀에 누워/ 돌하르방으로 있을 시간// 허기진 눈 감을 수만 있다면/ 실안개 빗금 긋듯/ 귀만 열고 살면 되는 걸/ 우리 더러는/ 하늘빛 넉넉한 오후만 보면서 살자'('부랭이'중에서)

▲신혼여행객이 넘실대는 유채밭 뒤로 오조리가 보인다. 4·3을 겪은 사람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살기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했다.

수소(부랭이)처럼 살지 않으면 안됐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가장을 잃은 시인의 가족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래도 가슴 한켠에 꾹꾹 눌러온 4·3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았다. 50대에 시인으로 등단한 그가 내놓은 첫 시집 '오조리, 오조리, 땀꽃마을 오조리야'(1996)는 4·3 이후의 삶을 조용히 읊은 시편들로 채워졌다.

시인의 어머니는 "덜 서러워야 눈물이 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 말처럼, 시인이 풀어낸 4·3 시는 통곡하거나 분노하기 보다 관조적이다. 주먹을 불끈 쥐고 목청 높이지 않아도 그의 시엔 4월의 생채기가 배어있다. 첫 시집에 뒤이어 나온 '가장 눈부시고도 아름다운 자유의지의 실천'(2000), '작디 작은 섬에서의 몽상'(2006)에서도 4·3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인의 고백이 읽힌다. 상념에 휩쓸릴 새 없이 어떻게든 살아야 했던 시인이 얼마만한 절제력으로 감정을 다스려왔는지 짐작하게 한다.

'성산포 터진목 바람이 내 뺨을 쌔리는 그런 날, / 나는 성산포항 서쪽 둑을, 둑처럼 무너지며 거닙니다./ 낡은 주낙배들이 무너지는 나를 보며 낄낄 거립니다./ 그럴 때 그 건너 그리운 이들도 함께 나를 보며 웃습니다./ 아주 찐하게 말입니다./ 다음 만나면 어디한번 더 찐하게 취해보자 하면서.'('성산포, 터진목 바람 부는 날')

오조리에 살고 있는 시인은 마음이 답답해지는 날이면 집근처 앞바르 터진목을 찾는다. 사방에서 휙휙 불어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곳을 한바퀴 돌고나오면 '답'이 나온다고 했다.

"상념에 젖을 틈이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으니"

4·3으로 가족 잃은 강중훈 시인


'어릴 적 / 초등학교 운동회 날/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 손을 잡고 달리는데/ 나는 하릴없이 높아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버지가 떨어뜨리신 구름 한 조각을 쥐고/ 달렸다. 운동장이 너무 넓어 울며 혼자 달렸다.'('구름 한 조각 손에 쥐고 혼자 달렸다')

강중훈 시인에겐 운동회때 함께 달려줄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것은 빚더미였다. 4·3으로 아버지를 잃자 초등학교 3학년이던 누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당장 일터로 나가야 했다. 하루하루 밥벌이를 걱정해야 했던 어머니는 평생 '미싱'을 돌렸다.

시인은 여덟살때부터 쟁기를 멨다. 밭을 갈아줄 남자가 집안에 없었기 때문이다. 등교길에도 밥을 지어 날랐고, 휴일이면 밭을 갈았다.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오조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눈앞의 우도가 그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던 소년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한다. 두부를 만들다 남은 찌꺼기로 끼니를 이어가다 몸이 축났다. 결국 시인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40년 가깝게 공직생활을 하기도 했던 시인은 4·3이 자신을 키웠다고 말한다. 시인의 어머니는 "폭도자식이란 말은 들어도 애비없는 자식이란 말은 듣지 않도록 행동하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지 못할 아픔을 체험했지만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4·3이 그에게 쉬이 삶을 포기하지 않는 힘을 주었다고 해야 할까.

"그날의 상처를 자꾸 떠올리면 내가 망가질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상념에 휩쓸릴 새가 없이 살아야 했다는 게 솔직한 말이겠다. "

그만이 아닐 것이다. 4·3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사람들은 울고불고 할 시간이 없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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