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현장을 찾은 날,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오름의 정상은 해무에 가린 채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목가적 풍경을 만들어내던 오름은 봉홧불이 타오르며 비극의 역사를 품는다. 볕좋은 날 카메라에 포착된 다랑쉬오름이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4·3 장편 동화산사람·군경에 시달리다 굴에서 희생'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나라'였나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무릎까지 높게 자란 잡초들을 헤치며 걷느라 물에 빠진 꼴이 됐다. 1시간여를 헤매는 중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60년전, 이곳으로 찾아든 사람들의 심정이 떠올랐다. 몸뚱아리를 숨겨줄 굴을 향해 중산간으로 오르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면, 그 굴에 숨어든 '폭도'들을 잡기 위해 눈을 밝힌 토벌대가 이 잡초지를 누볐는지 모른다.
"어둠이 우리 모습을 감추어주긴 했지만 발소리까지 감추어주진 않았다. 그래서 우린 귀를 쫑긋 세우고 발소리를 죽여가며 밭담을 넘어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등에는 곡식을 담은 자루가, 어머니 등에는 작은 솥이, 형 등에는 작은 냄비와 등잔과 옷가지들이, 내 등에는 소금과 미역 따위가 담긴 대나무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
다랑쉬오름 자락의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마을'표석은 잡목에 가려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표석을 길잡이 삼아 다랑쉬굴을 찾아나섰는데, 길을 잘못들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구좌읍 종달리 출신인 김승태 교사(세화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착했다.
굴 입구는 온갖 나무와 풀로 뒤엉켜 분간이 안됐다. 제주4·3연구소 회원들이 발견해 이듬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입구를 막아놓았다. 아홉살 사내아이에서 50대 여인까지 종달리에 살던 11명의 유해가 나온 곳이다. 다랑쉬굴 유골 발굴 10주년이 되던 2002년 4월 제주민예총이 세운 표석이 굴 입구에 쓸쓸히 놓여있다. 16년전, 제주섬에 충격을 던진 다랑쉬굴은 지금 군데군데 안내 문구가 벗겨져나간 빗돌만이 외로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박재형씨(57)의 장편 동화 '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2003)는 다랑쉬굴로 숨어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작품에 등장하는 굴은 다랑쉬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제주섬 어디든 있는 굴은 4·3때 은신처이자 희생터였다. '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가 4·3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진 것처럼, 주인공 가족이 몸을 피한 굴은 조천, 안덕 사람들이 그랬던 공간도 될 수 있다.
"언제면 점심을 굶지 않게 될까?" 경태도 여느 아이들처럼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로 허기진 배를 달랜다. 바다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돌틈에 잠든 고둥, 새끼소라, 게가 있어 맛난 밥상을 차렸다. 다랑쉬오름에, 높은오름에, 지미봉에, 둔지오름에 봉홧불이 오르면서 경태네 가족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튿날 새벽,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아직 날이 밝기도 전인데 온 마을이 소란스러웠다. 지서가 습격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지서에 무장한 산사람들이 쳐들어와 총을 쏘고 달아났다고 했다. 지서옆 골목에 산으로 올라갔던 순칠이 형이 죽어 나뒹굴고 있다는 말도 들려왔다. 마을에서 사라졌던 김선생님이 산사람들이 대장이 되어있더라는 말도…."('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
▲구좌읍 종달리 주민 11명이 희생된 세화리의 다랑쉬굴은 현재 굴입구를 막아놓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다. 유해발굴 10주년이 되던 해에 세운 빗돌만이 외로이 그 곁을 지키고 있다. /사진=김명선기자
세화리에서 성장기를 보낸 작가에게 다랑쉬오름은 봄철 고사리를 꺾던 곳이고, 2월이면 야초지에 놓은 불이 붉은띠처럼 번지는 풍경을 만들어내던 곳이다. 동행한 양인자 평대초등교 교감은 "다랑쉬오름은 오름관광 1번지로 꼽히는 곳"이라면서 "정상에 올라 바라다보이는 용눈이, 아끈다랑쉬 등의 오름군이 정말 아름답다"고 했다. 산봉우리의 굼부리가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는 뜻을 품고 있다는 다랑쉬오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날인데도 붉은 옷을 입은 등반객들이 오름 허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오름이 빚어내는 수묵화같은 풍경 아래 살았던 사람들에게 마음이 차갑게 돌아서는 일이 생긴다.
"한 가족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이젠 서로 마음을 꼭꼭 닫아걸고 살았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어디론가 끌려가기 일쑤인지라 속엣말도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었다. 미운 사람이 있으면 산사람편이라고 거짓으로 신고를 해서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일도 있었다."('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
경태네 가족은 산사람에게, 군인에게, 경찰에게, 서청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간당간당 목숨을 내놓으며 장만한 보리쌀을 가져가 버리고, 돈을 내놓으라고 하고, 강제로 혼례를 치른다. 누구는 선하고, 누구는 악하다는 말을 하기 어려울 만큼 힘없는 백성들은 양쪽에 시달렸다. 동굴로 피신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형을 한꺼번에 잃은 경태.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어찌하여 이 마을에 오셨습니까/ 놀러왔습니다 놀러/ 놀러왔습니다 놀러'라는 고무줄놀이 노래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봄은 다시 찾아왔다. 일본순사였던 민수 아버지는 죽창에 찔려죽는다. 경태를 '폭도새끼'라고 놀리던 민수는 이제 아이들에게 맞는 신세가 됐다. 마을을 뜨는 민수에게 경태가 한마디 한다. "잘가라, 널 용서해줄게." 소년은 4월을 견디며 성장해간다.
'고사리 할망'을 아니
다신 비극의 역사 없도록 4·3 교육을
사람들은 그를 '고사리 할망'이라고 부른다. 고사리 꺾는 계절이면 행방불명되는 할머니다. 4·3때 눈앞에서 아버지, 어머니, 오빠가 죽는 걸 봤다. 할머니는 혼자 살아남았다.
그래도 살아났으니 다행이라고 여기겠지만 할머니는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 산으로 들로 고사리를 꺾으러 나가는 때가 되면 할머니는 사라진다. 한달 가까이 모습을 감춘다. 굴속에 들어가 살다 나온다는 말이 있다. 가족들이 애타게 찾아내 집으로 가자고 하면 할머니는 무서워 못가겠다고 한다. 4월의 기억은 한 여인을 꽁꽁 묶어두고 있다.
4·3을 겪은 세대들은 두 손을 내저으며 "그때 살아난 말이랑 허지도 말라"고 할지 모른다. 무장대에게 피해를 입었다면 그 시선으로,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가족이 있다면 그 시선으로 4·3을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4·3을 들려줘야 할 지 고민되는 대목이다.
박재형씨도 '다랑쉬오름의 슬픈 노래'를 내놓는 게 간단치 않았다. '좋은 역사 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도 가르쳐야 다시는 그런 역사를 만들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집필에 들어갔다. 애초엔 4·3 소재 단편동화를 모은 창작집을 구상했지만 사건의 전개과정을 한눈에 들여다보기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장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제주섬 동부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특정 장소에 한정하지 않고 4·3의 특징을 드러내는 사건을 담아냈다. 경태의 외갓집에 등장하는 굴렁밭이 한 예다. 조천읍 북촌리 집단학살이 모티브였다.
작가는 "아직도 4·3의 발생동기나 성격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현실이라 몇년간의 망설임끝에 작품을 썼다"면서 "민중에 대한 탄압, 군경이나 서청의 횡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산으로 오르거나 동굴로 피신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