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23)김석교의 '숨부기꽃'

[4·3문학의 현장](23)김석교의 '숨부기꽃'
피멍울 새긴 모살동네에 보랏빛 내음
  • 입력 : 2008. 07.18(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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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다녔던 옛 성산국민학교 건물. 가난했지만 어린 꿈이 영글었던 그곳에 4·3 당시 할머니의 죽음과 연관있는 서북청년회가 머물렀음을 안 것은 훗날의 일이다. 지붕 기와가 산산이 부서진 학교 건물터는 마치 전쟁이 지나간 자리 같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터진목에서 총맞아 죽었다는 '귀막시 성할망'

모래밭 순비기나무엔 어제처럼 꽃이 피어나고

서청 거주하던 옛 성산교 자리 전쟁터와 같아



하얀 테왁 여남은개가 파도를 타고 출렁거렸다. 한낮의 태양이 살갗을 찌르는 시간, 잠녀들은 바다에서 자맥질중이었다. 세계자연유산 성산일출봉 허리를 휘감아도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한가로이 내려다보는 그 바다 모래밭 순비기나무에 꽃이 피었다. 이제막 피어오른 '숨부기'(순비기)꽃은 햇볕이 강해질수록 보랏빛이 짙어진다. 수도 없이 피고졌을 그 꽃들은 그 날의 광경을 지켜봤을까. 시인은 그곳에서 '1949년, 성산포의 기억'을 떠올린다.

'땡볕 푸르른 여름날/ 무덤 이룬 모래굴헝 뒤덮으며/ 그 아릿한 내음 펄펄/ 숨부기, 옛 사랑 보라꽃 피우느니// 말미오름에서 바우오름에서/ 큰물뫼 족은물뫼 모구리오름에서/개처럼 끌려와 피멍울 새긴 모살동네/ 통일 어느 날 서북사람들 찾아 와/ 무심히 사진기 누를 때// 그들에게로나 빙의할까/ 네 불휘 이끄는대로/ 우리 비로소 해원할까/ 듬북할미 입술 푸른/ 보제기 나의 꽃'('숨부기꽃')

'넋 달래려다 그대는 넋 놓고'(1999)를 낸 김석교 시인(50)의 4·3 시가 출발한 곳은 고향 성산포다. '곱을락', '쌍말타기', '총팡놀이'했던 일출봉 야외공연 무대하며 한여름이면 발가벗고 물장구치던 터진목 바닷가. 훗날 알고 보니 그곳은 학살터였다.

스무살 청년시절, 시인의 어머니는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다. "내 말 들은 체도 하지 말고, 어딜 가서도 입 다물어야 한다"면서. 얼굴도 모르던 그의 할머니는 나이들어 귀가 어두운 '귀막시 할망'이었다. 밭일하러 갔다가 저녁무렵 귀가하는 데 "누구냐, 서라"하며 할머니를 불렀던 모양이다. 터진목 부근에서였다. 할머닌 알아듣지 못했다. 등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총을 든 이들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서북청년회(서청) 사람들이었다. 할머니가 죽임을 당한 그 곳에선 오조리, 고성리, 수산리, 삼달리, 난산리 등지에서 끌려온 이들이 수십 명씩 총살당했다.

'성하르방 거친 바다 고기밥으로 내주고/ 홀로 삼남 일녀 키운 우리 할망/ 그 큰아들의 작은 손 성장하여/ 당신 쏘았을지도 모를 서청단원에게/ 잘 가시라 잘 가시라 절하며/ 2만원 든 향료값 올려놓고/ 민들레처럼 다시 피어나시라 축원할 때//제삿날 돌아와도 어머니나 친척들은 함부로 입 다물고 세상이 바뀌어도 말해주지 않았다/ 문상 가서도 그 서청단원 어떻게 살다갔는지/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 없었다'('어느 문상(問喪)')

4·3이 끝난 뒤 성산포에 눌러앉은 서청 사람이 운영하던 구멍가게에서 맛난 사탕을 사먹었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과는 한 동네에서 선후배로, 친구로 함께 자랐다. 할머니가 왜 죽었는지 알게 되면서 시인은 서청이 늘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했다. 아는 사람의 부친상에 갔는데 고인이 서청이었음을 알고 분노와 절망이 한데 밀려든 적도 있다.

양철지붕 구멍가게는 음식점으로 변했고, 그가 알던 서청들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기억을 일깨우는 장소가 남아있다. 서청이 머물던 옛 성산국민학교 건물이다. 김석교 시인은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성산리 킹마트 뒤편에 있는 학교터는 전쟁이 지나간 자리같다. 지붕을 덮던 기왓장은 절반이 넘게 어디론가 날아가 나무 뼈대만 남았다. 아이들이 재잘댔을 교실 유리창은 성한 데가 없고 바닥은 폐자재, 그릇 등 잡동사니로 찼다.

서청을 중심으로 짜여진 특별중대는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학교 담 너머에 있던 주정공장 감자창고는 수용소로 쓰였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비명소리를 매일이다시피 들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 나온다.

시인에게 고향은 어둠의 공간이다. 렌터카와 관광버스가 파도처럼 들고나며 관광객들로 들썩이는 곳이지만 어느 시절 학살, 고문, 납치가 이루어졌던 마을이지 않은가. 그 기억이 있는 한 4·3은 시인이 오늘도 품어야 할 이름이다.

'망각하므로 사는 것이라 누가 말하나/ 망각하면 또다시 죽는 것이라고, 와산리 종남밭/ 체온 식어버린 집터는 침묵으로 말한다'('와산리 종남밭엔 아직도')

▲순비기나무에 핀 보랏빛 꽃에서 아릿한 내음이 퍼진다. '숨부기꽃' 지천으로 자라는 터진목 모래밭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웃고 있어도 눈물나게

성산포 떠나 유적지 순례길에 4·3詩의 새로운 길 찾고 싶어


김석교 시인은 성산중학교 등하굣길 터진목 모래밭을 오가며 뼈를 본 기억이 있다. 동네 주민들은 사람뼈다, 짐승뼈다 말이 많았다. 그것이 어쩌면 4·3 당시 그곳에서 학살된 이들의 유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고향을 떠나서였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희생자수가 수만명을 넘고, 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진 온갖 형태의 죽임 앞에서 시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4·3 시가 할머니의 죽음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다.

"이미 나의 4·3시는 성산포를 떠났다"고 말하는 시인. 근래에 그는 4·3유적지를 한곳씩 순례하고 있다. '선흘곶 캄캄한 굴 속', '오등리 죽성마을 지나며', '와산리 종남밭엔 아직도', '태흥리 모자 쌍묘 앞에서', '북촌리여 북촌리여'등과 같은 시는 그렇게 탄생했다. 유적지를 돌며 시라는 형식을 통해 주민들의 희생을 기록하고 있다. 시인은 속도는 더디지만 가는 데까지 가보고 싶다고 했다. 4·3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것의 전개, 결과, 성격 등을 찬찬히 들여다본 뒤 새로운 4·3시를 써볼 생각이다.

그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이야길 꺼냈다. 유대인 학살의 비극을 웃음으로 풀어낸, 웃고 있어도 눈물나는 그 영화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유대인들이 학살 만행을 용서하되 영원히 잊지 않고 수십 년이 흘러도 다양한 예술방식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4·3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4 ·3의 희생자가 3만명이라면 3만개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못다한 4·3 이야기가 있을 거라 본다.

"올해는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이 발표된 지 30주년이 된다. 나를 비롯한 동료들이 남긴 문학적 성과는 아직도 미미하다고 느껴진다. 더욱 분발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크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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