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25](8)타라마섬에서 살다

[표류의 역사,제주-25](8)타라마섬에서 살다
바닷길로 흘러흘러 온 문화가 섬 빛깔 물들이다
3부. 김비의와 오키나와
  • 입력 : 2009. 10.30(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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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마섬에선 사람보다 염소가 더 많은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염소를 우연히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다. /사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평평하고 넓은 고구마 모양 섬 제주 김비의 기록에 첫 등장
네덜란드·일본 본토 등 섬에 표류한 흔적 지방문화재 지정

일본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시의 공항에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야코섬에서 다시 20석짜리 소형 비행기를 탔다. 머지않아 고구마처럼 둥그렇게 생긴 섬이 눈에 들어왔다. 타라마(多良間)섬으로 구로시마를 떠난 김비의 일행이 새롭게 발을 디딘 곳이다. 구로시마 사람 8명은 남풍을 기다려 한 낮과 밤 절반을 항해해 한 밤에 이 섬에 도착한다. 성종실록은 이 섬을 '타라마(他羅馬)시마'로 적었다.

▲타라마섬의 어부가 금방 바다에서 건져올린 팔딱팔딱한 고기를 그릇에 담고 있다.

# 염색 의복은 주변문화 교류의 증거

이시가키섬과 미야코섬 사이에 우뚝 서있는 타라마섬엔 1300여명이 살고 있다. 섬에서 8㎞ 떨어진 곳에 5명만 거주하는 부속 민나섬을 뒀다. 차를 타고 섬을 한바퀴 도는 데 20분 남짓 걸릴까. 이곳은 바다 날씨가 조금만 궂으면 곤란을 겪는다. 섬으로 들어오는 식료품 따위가 제때 도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섬 사람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사탕수수를 키우며 선조들이 이어온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하지 않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선사시대 패총, 중세·근세의 마을터 등이 확인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비의는 "타라마섬은 평평하고 넓어 산이 없으며 둘레가 가히 하루 거리입니다. 50여 가호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언어·음식·집 모양새· 풍속이 대개 윤이섬(요나구니섬)과 동일합니다"라고 성종실록에 구술해놓았다. 덧붙여 기장·조리·보리는 있지만 쌀은 없다고 했다. 재목이 없어 이리오모테섬이나 이라부섬에서 가져온다. 과일나무도 없다. 그 풍속에 모시를 쓰며 남색을 염색해 옷을 짓는다.

타라마섬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김비의 표류기다. 이 섬을 연구하는 이들은 그 기록을 꼼꼼히 따진다. 의복을 깨끗하게 남색으로 염색해 입었다는 것으로 미뤄 주변 문화의 흡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한다. 반면 1478년 타라마섬의 거주 세대가 50여호라는 기록에 대해선 당시 섬에 흩어진 여러 마을을 제주도 표류인들이 모두 목격했을까란 의문을 던진다. 그보다 많았다는 게다. 과일나무가 없었다는 기록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인다. 김비의 일행의 체류 당시 과일나무가 그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치넨 노부오(知念信雄) 타라마교육위원회 교육과장은 "타라마에 머물렀던 제주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섬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런 사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다"면서 "조선왕조실록이 타라마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타라마섬을 뒤덮고 있는 초록빛 사탕수수 물결 사이로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있는 차가 보인다.



# 외국 상선 표착지 등 문화재 지정 보호

제주 사람들이 요나구니섬에 표착했듯, 타라마섬에서도 바다가 데려다준 이방인들의 출현이 잦았다.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네덜란드 상선 조난의 땅'이다. 타라마섬은 네덜란드인 표착지를 타라마촌(村)문화재로 지정해놓았다.

1857년 네덜란드 상선이 상하이를 출발해 싱가포르로 향하던중 타라마섬 부근에서 난파당한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27명. 그중엔 여자와 어린 아이도 1명씩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널빤지에 의지해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타라마섬에 다다른다. 타라마섬 사람들은 이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김비의 일행이 요나구니섬에 표착해 여러 섬을 거쳐가는 동안 그랬듯, 타라마섬에서도 집집마다 돌아가며 네덜란드 표류인들을 돌봤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몸짓 언어로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들은 9일동안 섬에 머문 뒤 고향으로 향하는 바닷길에 오른다.

이들만이 아니다. 1859년 1월 남부 미야코 뱃사람 7명이 폭풍우를 만나 70여일동안 생사를 헤매다 타라마섬에 표착한 일이 있다. 이때도 섬 사람들은 이들의 무사 귀향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수백년뒤인 1976년 지금의 니와테(岩手)현 미야코시에서 시민의 뜻을 모아 타라마섬에 '보은의 비'를 세운다. 타라마섬 사람이 선조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타라마섬은 7년 뒤 이 빗돌을 문화재로 지정했다.

/오키나와현 타라마섬=진선희기자

▲타라마섬에서 만난 아이들

제주-타라마 표류로 인연

1497년 타라마 주민 제주 표착 "바다를 건널 식량 넉넉히 주라"


김비의 일행은 한달쯤 타라마섬에 머문 뒤 그곳을 떠났지만 둘의 인연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타라마섬 사람들이 제주에 표착하는 일이 벌어진다.

1497년 타라마섬 사람들이 류큐 왕조에 홍화(紅花)를 바치고 돌아가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 제주에 표착한 일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표기된 타라마섬의 명칭은 '이야구타마라시마'. 지금의 미야코 타라섬을 말한다.

표류인은 모두 10명이었다. '연산군일기'엔 수가운도로, 이시두로, 망구고로 등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했다. 당시 타라마섬에 홍화가 대량 생산되었고 섬 밖에서 교류가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 20년전쯤인 1479년 류큐국에서 김비의 일행을 데리고 온 사례 등을 더듬어 "바다를 지나갈 만큼 식량을 넉넉히 주어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타라마 사람들의 송환 절차를 논의했다.

1530년에도 류큐국 사람 7명이 제주에 표착한 일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들을 '마도'사람으로 언급했는데, 타라마섬에선 이들을 타라마의 선조로 본다. 7명은 그해 7월 중순에 다른 섬에서 벼를 수확하기 위해 뱃길에 나섰다가 강풍에 휘말려 표류한다. 당시 조선왕조는 표류인들에게 그곳의 풍습을 캐묻는다. 너희 나라는 중국에 조공하는가, 국왕과 남녀 신하의 의복은 어떠한가, 부모의 상중에 음주와 육식을 하는가, 벼는 한 해에 몇 번 심고 거두며 어느 달에 갈고 심었다가 어느 달에 거둬들이느냐 등을 물었다.

그에 덧붙여 1497년 제주에 표류했던 타라마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다. "너희 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표류했던 사람은 누구며 생사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에 그들이 답한다. "타라마섬에 사는 우모라는 사람인데 살아 있다."

조선에서는 타라마섬 표류인을 문정하면서 통역에 애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체류하는 '왜인'중에 류큐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했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지는 탓에 이국인들에게 두터운 의복과 갓을 빨리 장만하라고 하는 등 조선은 타라마섬 사람들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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