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26](9)이라부에서 다시 한달

[표류의 역사,제주-26](9)이라부에서 다시 한달
20분 뱃길에 다리 놓이면 섬은 더 행복해질까
3부. 김비의와 오키나와
  • 입력 : 2009. 11.06(금) 00:00
  • /오키나와현 이라부섬=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 글자크기
  • 글자크기

▲530여년전 이라부섬을 찾은 제주도 표류인들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 주변은 밭으로 변해있었다. 택시 기사가 주변에 물어물어 겨우 마을터로 안내했다. /사진=진선희기자 jin@hallailbo.co.kr

1308년 마을 형성된 이라부섬에 170년뒤 김비의 일행 체류
미야코시 합병· 다리 공사 등 섬을 둘러싼 환경 세차게 변화


섬과 섬을 잇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일본 오키나와현 이라부지마(伊良部島)에서 미야코지마(宮古島)를 바라보니 그랬다. 두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이면 이라부지마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뱃길은 뚝 끊기고 그 바다 위에 놓인 다리를 차가 내달릴 것이다.

이시가키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야코 공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미야코섬의 항구로 발길을 돌려 배에 몸을 실었다. 20분쯤 지났을까. 이라부섬 사라하마항에 다다랐다.

# 류큐왕조 있는 나하에 점점 가까이

김비의 일행은 류큐왕조가 있는 나하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타라마섬에서 한달 내외를 체류한 뒤 섬을 떠난 그들은 작은 배를 타고 하루 낮을 가서 이라부섬에 도착한다.

"이라부섬은 둘레가 가히 2일 거리이며, 그 언어·음식·집·모양새·풍속이 대개 윤이섬과 같습니다. 그 의복은 타라마섬과 동일하고, 우리를 먹여주는 것도 역시 동일하였습니다."

오키나와 본토에서 남쪽으로 300㎞ 떨어진 이라부섬은 1308년 최초의 취락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야코 등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일군 섬이다. 인도네시아문화의 흐름이 엿보이고 대만, 필리핀, 중국 등과 교류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문화재가 흩어져있다.

1317년 이라부섬 사람 4명이 다른 곳으로 항해하던 중에 중국에 표착한 사례가 전해온다. 제주사람 김비의 일행이 1477년 요나구니섬에 표착해 이듬해 이라부섬까지 흘러흘러 갔듯, 이라부섬 사람들도 일찍이 표류를 경험하며 바다를 헤쳐왔다.

'성종실록'에 표기된 이 섬의 명칭은 '이라부(伊羅夫)시마'. 부인들이 목에 수정과 큰 구슬을 걸었고, 쌀은 보리의 10분의 1이며, 술을 빚을 때는 쌀누룩을 쓴다는 등 여느 섬처럼 인상적인 견문 내용을 담아놓았다.

제주 표류인들이 이라부섬에 도착한 때는 마을이 생기고 170년이 지나서다. 그 기간동안 이주가 계속되며 새로운 마을이 섬에 생겨났을 것이다. 이라부섬 출신으로 미야코시의회 의원인 나카마 아키노리(仲間明典·56)씨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꼼꼼히 되짚으며 표류인들을 어느 마을에서 보살폈고, 어느 항구로 들어오고 나갔는지 분석해 나갔다. 30년동안 이라부초 문화재 분야 공무원을 지낸 그에게 조선왕조실록의 김비의 표류기는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다.

▲이라부섬과 미야코섬을 잇는 다리가 완공되면 섬 주민을 태우고 바다위를 오가던 뱃길도 끊길 것이다.

# 열악한 재정 여건 탓 합병 불가피

530여년전 김비의가 거쳐간 이라부섬은 어제의 얼굴이 아니다. 8개 자연마을에 7500명이 살고 있는 그곳은 3년 후면 미야코섬과 '연륙'된다. 다리 공사가 끝나는 해다. 다리 공사를 빨리 시작하라며 궐기대회까지 열었을 정도로 이라부섬 사람들은 이 사업이 섬의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생활환경과 복지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섬의 변화에 늘 긍정적인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99년 일본에서 우리의 시읍면쯤에 해당하는 '시초촌(市町村)'합병 특례에 관한 법률이 개정된다. 이때 약 3200개 시초촌을 1000개 정도로 합병한다는 구상이 나왔다. 오키나와현은 이에따라 53개를 12개로 한다는 기본방침을 세운다. 미야코 권역에서도 이라부섬을 포함한 6개 시초촌을 하나의 지자체로 만든다는 계획아래 합병 작업이 진행됐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반대 여론이 거셌다. 이라부섬도 초기엔 타라마섬과 더불어 합병 반대 의사가 다수를 차지했다. 타라마촌장은 "민의를 존중해 합병협의회에서 탈퇴한다"고 했지만 이라부촌장은 "마을의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 자립은 불가능하다"며 합병 추진 의사를 재차 밝힌다. 결국 타라마섬을 제외한 5곳은 2005년 10월 미야코시로 합병된다.

타라마섬에서 만난 몇몇은 "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합병을 반대했다"고 말했다. 합병 반대를 외쳤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이라부섬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지만 세찬 외풍을 막진 못했다. 섬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시의원 나카마 아키노리씨 "표류 통해 문화 전파 이라부섬 예외 아니"

"제주도 사람들이 지금의 사라하마에 머물렀다면 생선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문화재 공무원에서 시의원으로 변신한 나카마 아키노리(仲間明典·사진)씨는 진지하게 물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김비의 표류기는 이라부촌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다. 1979년 발간된 '이라부촌사'에도 4쪽에 걸쳐 김비의 표류기가 소개됐다.

그는 30년전, 우리식으로 말하면 향토학교쯤 되는 '고향대학'의 교재를 만들어 이라부섬의 역사를 가르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자료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데 1477년 요나구니섬에 표착한 제주도 사람들이 여러 섬을 경유한 뒤 이라부섬에 머문 대목이 거기에도 언급된다.

"작은 섬에선 표류인들을 통해 여러 문화를 배우기도 합니다. 이라부섬의 역사도 따지고보면 표류한 사람들의 역사나 다름없습니다. 다른 섬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마을을 일구고 살았으니까요."

바다가 가로놓여 있을 뿐 섬과 섬은 언제나 열려있다. 밀려들고 빠져나가길 반복하는 파도처럼 섬마다 바닷길을 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배어있다. 530여년전 김비의 일행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라부섬 사람들이 제주에서 온 표류인들을 따뜻하게 대접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이라부섬 사람들이 이미 그런 일을 경험했으니까요."

그는 김비의 일행을 태우고 온 타라마섬의 배가 다다른 항구가 어느 곳인지, 어느 마을에 체류했는지를 당시 섬의 역사에 견주어 따졌다. 그의 주장대로 표류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인 '토오미무라'는 오래전 사라졌다. 낯선 자들이 침입하고 전염병이 돌면서 마을은 생겨나고 사라지길 반복했을 터다. 섬을 운행하는 택시 기사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마을터는 밭으로 변해있었다. 이라부섬 푸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였다. 옛 마을을 빠져나오는 길, 키큰 사탕수수잎이 바람에 너울거렸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1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