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규 칼럼]소금에 얽힌 제주 이야기

[강문규 칼럼]소금에 얽힌 제주 이야기
  • 입력 : 2011. 09.06(화) 00:00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만 해도 중산간 마을에서 자란 이들이면 커다란 대나무구덕에 갈치나 자리돔, 고등어, 각재기 등의 어획물을 계절에 따라 팔러 나온 상인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그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피로감이 역력했다. 그러면 어머니나 이웃집 아줌마들은 잠시 짐을 풀고 쉬도록 하면서 돈이나 곡식으로 생선을 사들이기도 했다. 셈을 마치면 상인들은 물 한사발 마시고 총총히 자리를 떴다. 생선이 변하기 전에 한 마리라도 더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좀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생선장수들이 다녔던 그 길은 '쇠장시'나 '몰장시', '소금장시'들이 휘적거리며 걸어갔을 것이다. '소금장시'들에 비해 '몰장시'·'쇠장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거액의 현금을 갖고 다녔고, 마을마다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마을마다 현지처를 두었던 이들의 일화도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금장시'들도 한 때는 잘나갔다. 중세시대 소금은 '백색 황금'으로 여겨졌고, 로마 군대는 급여를 소금으로 지급했을 정도다. 소금이 환금성 높은 물품으로 각광을 받았던 것은 그 만큼 인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제주의 민속에도 팥과 소금을 뿌림으로써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땅을 정화한다고 여겨왔다.

제주도에서 소금을 만드는 제염(製鹽)의 역사는 강여목사가 재임(1573. 5~10) 중 육지부에서 제염법을 배우도록 하며 시작됐다. 구좌읍 별방(세화리, 종달리), 성산읍 등지에서 먼저 시작한 뒤 서부지역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주지역에서 소금 만드는 마을로 가장 유명했던 곳은 종달리였다. 이러한 사실은 민요와 구전으로도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새해를 맞으면 첫 정일(丁日)의 날씨를 보고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는데 날씨가 청명하면 "종달리 여인들 남죽 들고 춤춘다"는 속담도 있다. 이는 날씨가 좋아야 소금만들기가 순조롭게 되고 생활의 풍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남죽 들고 춤춘다'는 말에는 종달리 소금만들기 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남죽은 바닷물을 가마솥에 떠놓고 가열할 때 썼던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월읍 구엄리에서는 천연의 지형을 이용한 제염법을 썼다. 해안가의 넓은 바위에 찰흙으로 나지막하게 둑을 쌓아 바닷물을 떠 놓으면 햇볕으로 뜨거워진 바위가 수분을 증발시키는 천연제염법이다. 소금을 만드는 데는 10일 정도가 소요됐다고 한다. 그러나 중간에 비가 오게 되면 소금농사를 망치게 된다. 그래서 비가 내릴 조짐을 보이면 수분이 증발(蒸發)해 소금 알갱이가 섞여 있는 물을 항아리 등에 담았다가 다시 암반에 쏟아내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그런 암반이 동서로 500m , 면적은 대략 3000㎥ 가 되었는데 제염에 종사하는 가구도 30~40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은 소금을 달구지나 등짐을 지고 이웃마을을 돌아다니며 곡식과 맞바꾸었으니 그 지역에도 소금장시들의 애환이 서린 소금길이 있었던 셈이다.

며칠전 정광중 제주대교수(인문지리학)로 부터 구엄리 염전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다녀 왔다. 그곳에서 '구엄리식' 제염기능을 갖고 있는 조두헌(74)옹을 만나 소금을 만드는 과정을 접할 수 있었다. 그 곳에 제주의 또 다른 전통문화 곳간이 있었던 것이다. 제주시는 두번에 걸쳐 제염터를 복원하도록 지원함으로써 역사유적보전에 관한 올바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제염기능을 후세에 계승하도록 제염기능자 지정 등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치는 행정의 조그만 관심과 의지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다.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331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