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제주 유배인과 여인들](1)시작하며-유형의 섬

[신년기획/제주 유배인과 여인들](1)시작하며-유형의 섬
삶의 애환 가득한 역사의 뒤안길 유배 이야기
  • 입력 : 2012. 01.01(일) 00:00
  • /표성준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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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제주인들이 제주문화 발전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오현단'. 오현 중 김정과 정온, 송시열이 유배인이라는 사실은 유배문화가 제주문화 지층의 한 축을 형성했음을 알려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범 집결… 제주문화 형성
유배인과 인연맺은 제주여인들의 자취는 스러져
삶과 죽음·기쁨과 슬픔으로 점철된 유배생활 조명

시월서도 놀아온 생이
강남서도 놀아온 생이
오늘 가져 늴 가져 허난
청대 섶에 찬 이실 내련
날개 젖언 못 날암서라


서울에서 날아온 새
강남에서 날아온 새
오늘 가야지 내일 가야지 해도
청대 잎에 찬이슬 내려서
날개 젖어 못 날고 있더라

(제주인들이 유배객을 보며 부른 노래. 진성기의 '남국의 민요' 중에서)


 "묻힌 옥, 숨은 향기 문득 몇 년이던가. 누가 그대의 억울함을 하늘에 호소하리. 황천길 아득한데 누굴 믿고 돌아갔나. 정의의 피 깊이 감추고 죽음 또한 까닭이 있었네. 천두에 아름다운 이름들 형두꽃처럼 빛나며 한 집안의 두 절개, 자매가 현숙하여라. 젊은 나이의 두 무덤, 이제는 일으킬 길 없고 푸른 풀만이 말갈기 앞에 돋아나는구나."(조정철의 '홍의녀지묘'. 김익수 역)

 조선 정조 때 조정철이 제주 여인 홍윤애를 위해 지은 비문이다. 조정철은 조선 역사상 최장기 유배객이었으며,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와 부친에 이어 3대째 제주에 유배된 인물이다. 당시 홍윤애는 제주목사가 조정철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려고 하자 연인 조정철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당시 이 사건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혀 정조는 어사를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정철은 홍윤애가 자살한 지 31 년 만에 환갑의 나이로 제주목사에 부임해 홍윤애의 무덤을 단장하고 비문을 지어준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성을 위해 세워준 유일한 이 비문은 우리 유배문학의 꽃으로 평가받는다.

최적의 유배지

 조선시대에는 사형과 유형, 도형, 장형, 태형이라는 다섯 가지 형벌이 시행됐다. 유배형을 뜻하는 유형은 주로 반역죄 등 중죄를 지은 정치범을 고향에서 먼 곳으로 보내 평생을 살게 하는 형벌이었다. 형기가 종신이지만 노역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금으로 치면 '무기금고' 격인 셈이다. 유배형은 사형보다 낮은 형벌이긴 했지만 선비가 살아서 느낄 수 있는 최악의 치욕을 안겨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거나 도중에 사약을 내려 죽음에 이르게도 했다.

 유배는 당쟁으로 점철된 조선시대에 반대파를 탄압하고 고립시키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다. 유배지 중 가장 혹독한 곳은 육지와 차단된 섬이었으며, 그중 제주도는 조선 선조(1552~1608)의 7남인 인성군의 아들 이건(1614~1662)이 제주풍토기에 기록한 것처럼 최적의 유배지였다. 본토와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조건은 제주도를 정치범 수용소 또는 유형의 섬으로 악명을 떨치게 했다.

 영조 33년(1757)에 전라 감사 이창수는 "유배인이 제주목에 집중하니 연좌인들을 제주삼읍에 분배하고 싶다"고 비변사에 건의했으며, 한말 제주에 유배된 김윤식은 "제주적인이 하루하루 많아져 드디어 섬에 넘치려고 한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당파싸움의 희생자이기도 한 당대의 반체제적 지식인들이 제주 땅에 집결했음을 알려준다.

 유배 문화

 조선왕조 500년간 제주도에 유배됐던 중앙의 정치범은 2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다른 섬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 다수의 고관대작이 많이 유배됐던 것이다.

 조선 제15대 왕으로 15년간 국가를 통치하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1575~1641)을 비롯한 왕족과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 등 외척, 조선후기의 대표적 학자인 추사 김정희 등 유학자까지 유배인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유배인 중에는 제주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지만 유배가 풀린 후 중앙 정계에 복귀해 출세 가도를 달리거나 제주에 정착해 입도시조가 된 이들도 있었다. 유학자였던 유배인들은 추사처럼 유배 중 학문과 예술을 꽃피우거나 간옹 이익처럼 동몽교관(군현에 소속돼 어린이를 교육하는 벼슬)이 돼 학문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는 화산섬 제주도의 자생적 문화 위에다 오랜 기간 제주에 머물던 유배인들이 전파한 새로운 문화를 융합시켜 지금의 독자적이고도 세계적인 제주문화를 탄생하게 했다. 옛 제주인들이 지역문화 발전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제단인 '오현단'의 오현 중 김정과 정온, 송시열이 바로 유배인이라는 점은 유배인들이 제주문화에 미친 영향력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여인의 삶과 눈물

 유배인들은 송시열처럼 온 가족을 거느리다시피 하거나 아들과 머슴, 계집종을 데려오기도 했지만 대부분 홀로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이 때문에 많은 유배인들이 제주에서 여인을 만나 관계를 맺고, 혼인을 한 뒤 자식을 낳기도 했다. 남자 혼자서는 식사와 의복수발이 불가능한데다 축첩을 용인하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 긷는 여자'라는 명목으로 내연의 처를 얻었음은 여러 문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만난 유배인과 제주 여인 사이에서 낳은 자식과 후손들은 이후 중앙과 인맥을 형성했으며, 학문과 문화를 창달하고 전파하면서 제주 문화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유배 때 첩실이나 그 소생에 관한 기록을 금기시해 유배인과 관계를 맺은 여인들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남존여비 관념이 뿌리 깊은 시대에 유배인들을 보살핀 여인들의 강인한 삶과 처절한 눈물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에 머물렀다.

 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최근 서귀포문인협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유배인과 인연을 맺은 여인들의 실상을 조명한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을 발표했다.

 본보는 이 발표문과 향토사학자인 김익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의 연구물을 토대로 유배인들의 문집 등을 참고해 유배인 그리고 유배인과 고락을 함께한 여인들의 자취를 더듬어볼 계획이다. 여러 유배인 중에서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인간미를 보여준 이들과 그들의 여인들을 발굴해 소개한다. 유배문화에 스토리텔링을 덧입히기 위해서다. 이 연재물의 제목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휘호는 서예가 강창화 선생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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