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오늘부터 매주 토요일, 해설사와 함께하는 산책길 운영아트마켓 활성화… 즐길거리 가득
작가들에게 산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 작가는 "사람들은 도시화될수록 일상의 번잡에 찌든 영혼을 맑히고 속엣말을 가다듬으러 바쁜 시간표를 쪼개 산책을 나선다. (산책은)일부러 고독과 몸의 수고를 빌려 자연에서 멀어진 발길을 자연에 바싹 붙이는 '본원적 귀향' 즉 자아 회복을 위한 충전"이라고 말한다.
길을 천천히 걸으며 사물들에 하나하나 눈을 맞추면, 안다고 여겨온 풍경의 깊고 아득한 내면으로 떠나게 된다. 그렇다. 산책길은 천천히 걸어야 한다. 특별한 장소가 아니어도, 익숙한 길이어도 중요한 것은 '천천히'에 있다.
서귀포를 사랑한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천천히 걸어보는 산책길이 올해에도 열린다. 서귀포시가 지난해 야심차게 펼친 프로젝트 '작가의 산책길'이 올해 더욱 풍성해진 즐길 거리로 관광객들을 사로잡는다. '작가의 산책길'은 말 그대로 서귀포시를 사랑한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이다.
천재화가 이중섭, 제주출신 한국 서예계의 거목 현중화, '폭풍의 화가' 변시지 등 서귀포시에 둥지를 틀었던 예술가들이 남긴 흔적을 더듬어가는 탐방코스다.
▲칠십리 시공원에서 바라본 천지연 폭포
도내·외 작가, 동아리, 시민, 학생 등 희망자를 신청받아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에 산책길 탐방에 나선다. 지난해 달마다 두 차례씩 열던 것을 11일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운영된다. 하지만 해설이 필요하지 않은 이들이라면 어느때든 걸으면 된다.
작가의 산책길과 함께 서귀포문화예술시장을 운영, 이중섭 거리 및 미술관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있는 작가의 산책길 탐방, 작가·지역주민 아트상품 전시판매, 문화체험, 라이브 공연 등도 펼쳐진다.
작가의 산책길이 열리는 날이면 이중섭거리 일대에서 더불어 열리던 문화예술시장 '아트마켓'도 더욱 활성화 된다. 작가·지역주민 아트상품 전시판매, 문화체험, 라이브 공연 등 더욱 다양해진 즐길거리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뿐만 아니라 서귀포시는 지난해 11월 특허청에 '작가의 산책길' 상표등록을 출원했다. 오는 3월경 상표등록이 결정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제주도의회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작가의 산책길 및 문화예술시장 운영관리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조례가 제정되면 곧바로 통합관람권발매시스템을 구축해 관람권 한 장으로 이중섭미술관, 기당미술관, 소암기념관, 서복전시관 4개소를 관람할 수 있게 된다.
서귀포시 관계자는 "앞으로 슬로우 시티(Slow City)가 새로운 관광의 패러다임으로 떠오르면서 스토리텔링 기법을 도입한 '작가의 산책길'과 '서귀포문화예술시장'이 서귀포시를 대표하는 문화관광상품으로 자리잡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일으키길 바란다"고 밝혔다.
▲기당미술관
▶서귀포의 예술가들=서귀포는 예술을 '부르는'도시다. 소암 현중화 선생(1907~1997)은 범섬이 내다보이는 법환동에서 5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했으며, 34세 되던 해에 일본 육조체(六朝體)의 대가인 쓰지모토 시유우를 만나 서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소암 선생의 작품 '취시선(醉是僊)'에 얽힌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된다. 선생이 어느 날 서귀포 시내의 한 요정에서 취흥이 오르자 먹을 갈아 한복 치맛자락에 붓글씨를 쓰다 방벽에 일필휘지를 했다. 며칠 후 제자들이 벽지에 쓰여진 글을 정성껏 떼어냈다. 이 작품은 현재 소암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제주의 거센 바람이 키운 '폭풍의 화가' 우성(宇城) 변시지 화백도 서귀포시 서홍동 출신이다. 그의 작품 '태풍' '폭풍' 등은 삼매봉 중턱에 위치한 기당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타지역 예술가들도 서귀포를 찾아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중섭 화백(1916~1956)은 6·25전쟁 기간인 1951년 1월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 온 뒤 1년여 동안 생활하면서 '서귀포의 환상', '바다가 보이는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 이란 작품을 남겼다.
▶코스는 어떻게 이뤄질까='작가의 산책길'코스는 이중섭 미술관에서 시작된다. 제주올레 6코스와도 맞닿은 곳이다. 이중섭미술관에서 출발해 동아리 창작공간~기당미술관~칠십리시공원~자구리해안~서복전시관~정방폭포~소라의성을 돌아 소암기념관에서 총 4.8km에 이르는 길이다. 해설사의 이야기와 함께 걸으면 2시부터 시작해 3시간30분이 걸리는 코스다. 올해부터는 작가의 산책길 곳곳마다 해설사가 배치돼 서귀포와 연을 맺은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에 대한 해설을 곁들인다.
기당미술관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설립된 시립미술관이다. '기당'은 기증자 강구범 호에서 떠왔다. 한라산과 서귀포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삼매봉 중턱에 자리잡고 변시지, 장우성, 장리석, 김기창, 박노수 등 현대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곳에 가면 기당의 친형인 수암 강용범 선생의 유작도 상설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칠십리 시공원에는 '향수'의 시인 정지용을 비롯해 서정주·박목월 등 시 13편과 3편의 노래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공원 표지석들은 600m에 이르는 산책길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하늘과 땅을 잇는 연못'이란 이름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천지연 폭포를 내려다보는 맛도 느낄 수 있다.
소암선생의 산책길 소남머리는 소암 선생이 냉수욕이나 수영을 즐겼던 곳이다. 자구리해안은 이중섭의 그림 속 어린이들이 게와 함께 놀았던 바다풍경을 담고 있는 곳이다.
겨우내 움추렸던 어깨를 펴고 이른 봄 작가의 산책길을 꼬닥꼬닥 걷다보면 봄기운을 머금은 야생초와 물소리, 음악소리, 예술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겨드랑이 사이로 봄기운이 스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