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엄마와 대형마트에서 장을 봤다. 오랜만에 대형마트에 가니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우선 한미FTA의 영향 탓인지 농산물의 가짓수가 대폭 늘었다. 엄마와 나는 가격도 저렴하고 호기심도 생기고 해서 여러 수입산 농산물을 샀다. 그 중에는 감귤의 대체재인 오렌지도 있었다.
다른 가정에게 집에서 오렌지를 먹는 일이 어떤 의미를 띠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에게 이 일은 큰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 전까지 우리 가족에게 오렌지란 주스 같이 가공된 형태로, 혹은 생과로는 호프집 과일안주에서나 맛볼 수 있는 과일이었다.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댁에서 감귤농사를 지으시는, 흔한 제주의 가정이었기에 우리집 뒷베란다에는 늘 '파치'가 넘쳐났다. 그런 가정의 식탁 위에 태평양을 건너 온 오렌지가 떡하니 자리잡은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기괴한 구도를 가진 정물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옆동네의 감귤보다 더 싼 오렌지라니. 우리는 물론 알고 있다. 거대자본이 운영하는 농업과 유통업이 생산한 오렌지는 저렴한 몸값을 유지한 채 너무나도 쉽게 태평양을 건널 수 있다. 그에 비해 영세농민들이 생산한 감귤은 바로 옆동네에 내다 팔아도 오렌지보다 비싼 값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논리가 정말로 당연한 것일까. 충분히 훌륭한 대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지 이제껏 그래왔다는 이유만으로 이 논리의 견고함을 유지하는 데에 동참한 것은 아닐까.
정부는 '풍성한 식탁'이란 이미지를 이용해 한미FTA와 기타 다른 경제권과의 FTA의 이점을 선전했다. 물론 이 선전은 마땅히 옳다. 우리 가족의 경우만 보더라도 식사 한 끼에 세계일주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 세계일주의 '세계'에는 '영세'라든지 '소수'라든지 '약자'라든지 하는 집단은 없다. 시장의 논리에 따라 특화, 분업화의 구조를 철저히 지키는 거대한 집단만이 그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이쯤에서 빨리감기를 눌러보자. 각 경제권에서 밀어주는 상품만이 식탁에 오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조금이라도 경쟁력이 약한 상품들을 가차없이 식탁에서 내몰 것이다. 각 경제권에선 자신들의 상품에 더 큰 경쟁력을 불어넣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되고, 결국 오렌지는 미국, 포도는 칠레라는 식의 공식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제 풍성한 식탁은 풍성한 식탁이 아니게 된다. 오렌지는 늘 미국산이게 될 것이고 포도는 늘 칠레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토불이 우리 농산물은 어디로 가게 될까.
미국산 쇠고기 수입 찬반논쟁이 한창 뜨거웠을 때 신문에 나왔던 사진 한 장이 문득 떠오른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찬성하는 정치인들이 한우를 먹고 있는 사진이었다. 풍성한 식탁은 그들만의 것이었다. 당장 오늘 먹을 것 해결이 급한 서민들은 더 저렴한 상품을 어쩔 수 없이 고르게 될 것이고 그 상품들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획일화된 상품들일 것이다. FTA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 농업계가 내세우고 있는 브랜드 고급화는 국내 농산물의 가격을 더욱 높일 것이고 결국 그 몸에 좋다는 신토불이 우리 농산물은 중산층 이상이 되어서야 풍성히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가설은 식탁 위에서만 적용되지 않는다.
<양은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