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산책로 주변에서 울긋불긋 단풍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숲길엔 가을이 조금씩 스미고 있다. 새빨간 단풍은 아니지만 시나브로 물들어가는 나뭇잎도 만날 수 있다. /사진=이현숙기자
산간에 불 놓아 밭 일군 '총각화전터' 눈길은은한 피톤치드향, 오랜 피로감도 훌훌
고즈넉한 숲길을 걷는 것이 일반적인 걷기보다 불안감과 스트레스 호르몬을 더 많이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숲에 가면 '행복감'이 증진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신비감을 간직한 한라산의 속살을 느끼며 걸을 수 있다면 행복감은 배가될 터. 그런 마을 숲길이 생겼다.
서귀포시 제2산록도로 인근 '호근산책로'에 가면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숲길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호근마을회(회장 오종석)는 최근 마을 숲과 시오름, 한라산 둘레길을 연결하는 '총각화전터' 4.5km 구간을 조성해 개장했다. 시오름과 한라산 둘레길을 잇는 중간 숲길로 다양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산책로는 호근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고근산과 학수바위의 숲을 지나 원시림 사이에 녹아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현대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산책로의 종착지인 시오름은 서호동 산간에 있는 760m의 오름이다. 시오름에 오르면 한라산이 한눈에 잡힐 듯 다가온다.
'호근산책로'에는 친환경 야자매트가 깔려 있다. 목재테크보다는 발과 땅이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숲길에는 제주인들의 지혜가 담긴 돌담길도 있다. 제주의 돌담은 제주의 환경적 열악함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열쇠였다. 돌 많은 토지에 널려진 돌들을 정돈해 얼기설기 쌓은 제주돌담은 바람에 무너지는 일없이 효과적으로 바람의 세기를 줄여 안전한 주거공간을 조성하고 흙의 유실을 막았다. 산책로를 10여분 남짓 걸으면 돌담길이 나타난다. 돌담 옆으로 쉼터도 간간이 마련됐다. 친절하게 나무 이름표도 세워져 있다. 서어나무, 송악, 꽝꽝나무 등 나무들에게 이름을 나긋하게 부르며 걸으면 혼자가 외롭지 않다.
1km 정도 걸어 올라가면 갈래길이 나온다. 위로 가면 조록나무 군락지, 왼쪽으로 가면 시오름이라고 표시돼 있지만 양쪽 길 모두 시오름에 오를 수 있다. 왼쪽길을 선택하면 '총각화전터'를 만날 수 있다.
'총각화전터'에서는 옛 생활사를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제주도 산간은 주로 목장으로 이용돼 왔는데 시오름과 총각화전 일대에는 산마를 풀어놓아 먹이는 산마장으로 이용됐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산간에 불을 질러 밭을 만들어서 살 수 있게 허락했다. '총각화전터'라는 명칭은 호근동에 살던 한 총각이 처음 들어와서 불을 놓고 밭을 일구었다는 이야기로 붙여진 이름이다.
좀 더 걸으면 피톤치드 함량이 많은 편백나무 숲을 만날 수 있다. 신비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풍경이다. 은은하고 독특한 향을 뽐내며 오랜 시간 숲길을 걸어온 탐방객들의 피로감을 잠시 잊게 해준다. 숲길 곳곳에는 졸참나무, 서어나무를 비롯해 한라산의 대표적인 난대식물이 다양하게 자리 잡고 있어 자연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아직 산책로 주변에서 울긋불긋 단풍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숲길엔 가을이 조금씩 스미고 있다. 새빨간 단풍은 아니지만 시나브로 물들어가는 나뭇잎도 만날 수 있다.
숲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손을 잡고 도란도란 걷는 '그림좋은' 부자(父子)를 만났다. '주황빛 아빠'와 '노란빛 아들'의 뒷모습은 가을 숲길과 잘 어울렸다. 부자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으니 그야말로 그림이 된다. 이 길을 찾은 이들이 모두 단풍 같다.
천천히 걷다보니 허리숙여 두팔벌려 반기는 오묘한 생김새의 나무에 발길을 멈추고 만다. '연리지'같은 외형은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만 같다. 숲길을 돌아나오니 산록도로변에 억새도 찬란히 빛난다. 가을은 이래저래 마음 속 깊이 오고 있다. 이 길이 짧게 느껴진다면 바로 옆 '서홍동 추억의 숲길'도 걸으면 된다. 두 숲길의 입구는 바로 인접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