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 기운이 연두색의 속살을 내밀게 하고, 따가운 열기는 녹색의 계절로 인도한다. 울창한 녹색의 나뭇잎과 열매는 거세게 몰아치는 태풍과 폭우, 작열하는 태양을 견디며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서늘한 정기는 들국화와 모과 향을 잘 익게 하고, 대자연을 적·황색의 의상으로 갈아입게 한다.
유월에 담은 매실과 여름에 담은 산딸기 술이 익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야생 들국화가 자신을 뽐내기 위해 노력하는 가을이다. 삼복염천(三伏炎天)과 태풍, 볼라벤 속에 다양한 향과 색깔의 과일들이 영글었다.
적·황색의 의상을 벗고 벌거숭이로 돌아가는 자연 환경의 길목에서 들국화의 지위는 대단한 것 같다. 찬 서리가 내려도 고고함을 잃지 않는 품격으로 인해 사군자의 구성원이 된 국화를 선조들은 즐겨 이용했다. 그래서 선조들은 음식으로 국화전, 국화주, 국화차를 애용했으며, 상감청자에는 들국화 문양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화가 장승업, 김홍도 등은 국화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정갈한 다기 속에서 노란 국화꽃 향기가 은은하게 피어오르면 옛 친구가 옆에 앉아있는 듯해진다. 이 향기를 마시기 위해 찻잔을 가까이 하면 꽃을 따는 아리따운 처녀의 모습과 친구의 부드러운 미소가 추억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그리고 이 향은 한가위의 둥근 보름달을 연상시킨다.
어떤 시인은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라는 시를 읊으면서 국화를 가을의 버팀목으로 예찬했다.
필자는 향기가 가슴에 스며들 때는 먼저 사과나무 꽃과 모과 향기를 더듬는다. 모과가 최고조의 노란 빛깔로 물들어 있을 때 그 냄새야말로 일품이다. 나의 후각신경은 인공적인 향수·화장품 등 자극적이고 강렬한 많은 종류의 냄새와 환경오염 물질이 토해내는 냄새에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과에서 풍겨나오는 자연의 향기는 코를 정결하게 청소하고 가슴을 통해 전신을 순환하면서 절정의 안락감을 선물한다.
향기는 인체에 유익한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는 장미꽃 침대에서 잠을 잤고, 마릴린 몬로(Marilyn Monroe)는 침대에 향수 Chanel No. 5를 뿌렸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가을과 겨울철에 모과 냄새는 뽐내지 않고 겸손하고 수수하며, 무엇보다는 오랜 기간동안 은은한 자태를 유지한다. 겨울철 실내에서는 어떠한 냄새와 향수보다 모과의 것이 최상품이다.
모과는 알칼리성 식품으로서 과당·칼슘·칼륨·철분·비타민C 등을 내포하고 있다. 타닌 성분이 있어 떫은 맛, 사과산·구연산 등의 유기산이 들어 있어 신맛이 난다. 이런 다양한 성분들이 인간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소화효소의 분비를 촉진하여 소화기능을 순조롭게 하므로 속이 울렁거리거나 설사할 때 먹으면 편안해진다. 신진대사를 좋게 하여 숙취를 풀어주고, 가래를 없애줘 한방에서는 감기나 기관지염·폐렴 등에 약으로 쓴다. 더구나 겨울에 한 잔의 모과주와 모과차에서 발하는 빛과 향기는 삶을 윤택케 할 것이다. <제주대학교 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