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영화 '지슬'
  • 입력 : 2013. 05.14(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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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나는 최근에야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를 보았다. 다른 지역 친구들이 다들 지슬을 보고 와서는 열띤 토론을 벌이는데, 제주도 출신인 나만 영화를 못 봐서 토론에 끼지 못하는 게 아이러니했다. 개봉한 지 두 달이 넘어서 상영하는 곳이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수도권의 유명한 독립영화관 몇 곳은 그때까지도 지슬을 상영하고 있었다. 상업영화도 두 달을 버티기 힘든데, 지금 독립영화계에서 지슬이 '뜨거운 감자'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지슬은 한마디로 애도의 영화였다. 여태껏 4·3을 다루었던 작품들이 4·3의 특수성에만 매달려서 제주도 밖을 벗어나지 못한 반면, 지슬은 애도라는 보편적 정서를 맨 앞에 두었기 때문에 제주도 밖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 듯했다. 애도는 예술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다. 각박해지는 현대사회는 애도를 어렵게 만든다. 소수, 혹은 피해자들은 사회에서 쉽게 잊힌다. 그들을 잊고서도 사회는 잘도 굴러간다. 사실 그들 없이도 잘 굴러가기 위해 현대사회는 애도를 어렵게 만든 것이다. 지슬은 그 어느 쪽의 편을 들지 않고 오로지 4·3에 얽혔던 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애도한다. 그렇기에 지슬은 인간적인 영화다.

인간의 영역에서는 내 편 네 편이 없다. 인간은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이 완전히 한 쪽 편에 선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좌파와 우파는? 전쟁은? 이러한 편가르기는 만들어진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위에 서 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개성을 무시하고 한 명 한 명을 돼지처럼 몇 개의 우리 안으로 집어넣는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류된다. 그렇게 분류된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먹잇감이 된다. 인간이 자신들의 진보를 위해 이데올로기를 만들었지만 되레 이데올로기에게 이용당하는 꼴이 된 셈이다.

지슬(혹은 실제 4·3)은 인간에게 가해진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데올로기는 주민들과 군인들을 적대적인 관계로 설정한다. 실은 그 두 집단이 적이 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명령을 받은 군인들에게 개인적인 판단은 거세된 상태다. 그들은 감지하고 있다. 지금 자신이 총구를 겨눈 이가 어쩌면 빨갱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명령이 그들의 방아쇠를 당긴다. 마주치는 주민들은 모두 빨갱이니 죽이라는 명령. 그 명령의 근원, 그 명령을 내린 장본인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그러나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이데올로기 자체다. 국가라느니 민주주의라느니 하는 거창한 명분을 휘감은 이데올로기. 그런 거창한 명분 앞에서 개인은 개인이기를 포기한다. 이 말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여담이지만 지슬은 제목을 참 잘 지은 듯하다. 감자만큼 애틋한 정서를 누구에게나 끌어올릴 수 있는 음식이 또 있을까. <양은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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